"나도 대한국인이다!"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강점에서 벗어났지만 사할린으로 강제로 끌려간 징용자들에겐 광복이 아니었다. 징용 당시 다시 고향으로 데려다 주겠다고 약속했던 일본은 자국민만을 배에 싣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일본으로 떠나 버렸다. 조국 역시 이들의 귀국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조국은 광복을 맞았지만 이들은 그대로 사할린에 버려졌다.
◆사할린에 우뚝 선 한인
일본인이 떠난 탄광촌은 서글펐다. 밤이 되면 전등이 켜지지 않아 암흑천지였고, 일본인이 버리고 간 개들만 짖어댔다. 이들을 찾는 사람도, 찾아 주는 나라도 없었다. 이들은 이렇게 이곳 사할린에 버려졌고, 생존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야 했다.
세월이 흘러 지금은 교포 2세를 중심으로 한 사할린 교포 3천500여 명이 영구 귀국했지만 여전히 대부분은 사할린에 살고 있다. 패망 후 2010년까지 꾸준히 자국민을 본국으로 이주시킨 일본과는 사뭇 다르다. 일본은 고국으로 가지 않겠다는 800명만 제외하고는 모두 영구 귀국시켰다.
그러나 교포들은 이방인에 대한 현지인의 무시와 갖은 역경, 고난을 꿋꿋하게 견뎌냈다. 한국인 특유의 성실성을 앞세워 자신들만의 영역을 개척했고, 이들 교포 1세의 헌신 덕에 교포 2세들은 러시아에서 자리를 잡아나갔다. 그리고 교포 3, 4세에 이르러서는 러시아인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사할린을 제2의 한국으로 만들고 있다.
실제 한국 교포들은 현재 사할린에서 대학총장, 정치인, 변호사, 호텔 경영 등 사회 엘리트층을 형성하며 러시아 사할린 사회에서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부지런하고 열심히 땀 흘린 덕에 대체로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의학, 경제, 법학 등 한인이 진출하지 않은 분야도 없다.
◆"나는 한국인이다."
이제는 한인들을 무시하던 러시아인들도 한인을 자신들과 똑같이 인정해 준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시장도 우스갯소리로 한국 교포들에게 '한국으로 돌아가지 말고 이곳을 한국으로 생각하고 남아 달라'고 부탁할 정도다.
변호사 윤상철(65) 한인노인회장은 "변호사 자격증을 어렵게 따고도 한인이라는 이유로 변호사 활동을 못하고 탄광에서 일해야 했다. 그러나 구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이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서 변호사를 선발할 때 뽑혀 변호사 생활을 할 수 있게 됐다"고 했다. 또 "1945~1962년엔 같은 일을 해도 한인은 러시아인의 30% 수준의 임금을 받아야 했고 몇 년 일하면 국가에서 아파트를 주는데 이 역시 한인에겐 주지 않는 등 여러 가지 차별과 무시를 당했지만 지금은 아니다"고 했다.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시장에 출마했다가 2등으로 아깝게 당선을 놓친 오진하(60) 사할린주 두마의원은 "나는 부끄러운 한인이었다. 무시당하던 시절, 나는 한국인이라고 말하지 못했지만 우리 아들은 혼혈인데도 당당하게 한인이라고 한다"며 "비록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할린에 있지만 우리에게도 한국인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했다.
1970년대 한인 최초로 러시아 훈장을 받은 김홍남(66) 씨도 "한인으로 태어난 게 자랑스럽다"며 "다른 그 어떤 민족보다 잘살고 있다. 한인들은 러시아 어디를 가도 노력하고 열심히 한다"고 자랑했다.
경북 의성이 고향으로 유즈노사할린스크시 제1부시장을 역임한 김홍집(64) 전 사할린한인연합회장은 "사할린 교포 중에는 유독 대구경북 출신이 많다. 나도 1943년 아버지가 사할린 탄광으로 끌려와서 이곳에서 살게 됐다"며 "한국 기업, 한국인 등이 더 많이 사할린에 진출해 한국과 사할린이 더 밀접한 관계를 맺으면 사할린을 실질적인 한국의 땅으로 만들 수 있다"고 했다.
◆한인회, 매년 광복 행사-대구 청년들 동참
이처럼 버려졌지만 그래도 '한국인'임이 자랑스러운 이곳 사할린 교포들은 멀리 타국에서나마 해마다 광복절 기념행사를 자체적으로 마련해 광복의 기쁨을 나누고 있다.
사할린 한인회는 지난달 18일에도 유즈노사할린스크시에 있는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를 찾아 헌화한 뒤 코스모스경기장으로 이동, 제67주년 광복절 경축행사를 가졌다. 이날 광복절 기념행사엔 사할린 교포 3천여 명이 참석했고 교포 4세들이 사물놀이와 태권도 시범, 춤과 율동 공연 등을 해 행사장 분위기를 달궜다. 또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도 참가해 사할린 한인회의 광복절 행사에 힘을 보탰다.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는 6년 전부터 이들과 함께 광복절을 기념하기 위해 해마다 이곳을 찾고 있다.
러시아 최초의 사립대학인 사할린경제법률대학을 설립했고 러시아 1천200명 총장 중 유일한 한인인 강영복(68) 총장은 "한국 청년들이 정부를 대신해서 이곳까지 찾아 교포들을 위로'격려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며 "표현을 잘하지 못하고 한국인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지만 대구 청년들과는 정을 주고받으며 손님이 아닌 가족으로 느끼고 있다"고 했다.
하태균 민족통일대구시청년협의회 회장은 "나의 친할머니, 친할아버지가 강제 징용됐더라도 과연 가만히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강제로 사할린에 끌려오신 분들의 70%가 경상도 출신으로, 이들이 다름 아닌 바로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라고 했다. 이어 "'우리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광복절 행사 방문을 시작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지만 이러한 지속적 방문과 만남이 이들에겐 의미있고 큰 힘이 된다는 걸 깨달아 매년 이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사할린주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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