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논단] 일본 유감

이명박 대통령의 깜짝 독도 방문 이후 일본이 거세게 반발할 것이라고는 짐작하고 있었다. 일본은 울고 싶은데 따귀 맞은 듯 바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 준비에 착수했고, 참의원까지 나서 독도 불법 점거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독도는 그들이 늘 그래 왔으니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성노예(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까지 부정하는 총리의 참의원 연설은 도가 지나쳐도 한참 지나쳤다.

독도로 헤엄쳐 간 한국 연예인의 입국을 금지해야 한다는 차관의 발언은 이 나라의 왜(矮)함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국가의 격이 그 정도밖에 안 되니 어떻게 하랴 하며 눈과 귀를 가리고 싶다. 하지만 일본의 역사 왜곡과 왜소함이 역사의 순리여야 할 동아시아 평화공존과 더 나아가서는 지역통합이라는 큰 명제에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으니 그럴 수만은 없는 일이다.

유럽의 근대사는 아시아의 그것보다 훨씬 더 잔혹했다. 결코 타협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이기적 민족주의의 충돌, 그로 인해 발생한 수많은 전쟁. 하지만 여전히 탈(脫)근대의 과제를 안고 있는 아시아와는 달리 유럽은 전쟁 잔혹사를 지역통합이라는 기제로 종식시켰고, 유로존 위기로 조금 삐끗거리고는 있지만 하나된 유럽을 향한 여정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통합과정에 중추적 역할을 한 국가는 다름 아닌 전범국 독일이었다.

지속 가능한 국가의 안위를 위해 대동아공영권 구축이 필수라고 오판했던 일본과 같이 독일도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 건설을 위한 침략전쟁에 몰두해 1, 2차대전 발발의 주역이 된다. 전후 일본과 독일(서독)은 군사강국의 길을 포기하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모범국이 되고 반공(反共)에 앞장서 자유진영의 핵심국가로 거듭난다. 그러나 전후 독일 재건에 처절한 자기반성과 사죄, 보상이 선행되었던 것과는 달리 일본은 진정한 참회는커녕 지금도 침략전쟁의 성격 자체를 부정하며 영토분쟁에 골몰하고 있다.

전후 동서로 나라가 갈라지는 등 존망의 위기를 느낀 독일이 생존을 위해 적극적 주변국 화해정책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는 시각이 있다. 중국의 공산화로 아시아에 우방이 절실했던 미국이 일본의 역사 바로 세우기에 소홀했던 측면도 있다. 하지만 전후 양국이 보여준 상이한 역사인식을 이러한 외생적 이유로만 돌릴 수는 없다.

독일이 과오의 역사를 과감히 털어내고 미래지향적 주변국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층의 뼈를 깎는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패전 후 한풀 꺾이기는 했지만 편협한 민족주의가 여전히 팽배한 국내 정치적 환경에서 침략전쟁의 과오를 모두 인정하고 전범들을 철저히 추적해 처단하는 정책은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프랑스와 교과서를 공동으로 집필하기로 한 결정도,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를 방문해 전쟁 희생자 위령탑에 무릎 꿇고 눈물을 보이며 참회할 때도 국내에서는 비난의 여론이 들끓었다. 독일은 전후 커다란 영토 손실도 감수해야 했다. 동쪽 국경이 오데르-나이세(Oder-Neisse) 라인으로 다시 그어지며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고유영토의 많은 지역을 소련과 폴란드에 양도해야 했다.

하지만 영토의 손실, 일시적인 자존심의 상처, 그리고 국내정치적 위험을 감수한 독일 지도자들의 현명하고 미래지향적 결단으로 독일은 침략의 과거를 진정으로 용서받고 명실상부한 유럽의 지도국가로 거듭나 평화공존의 유럽통합사의 주역으로 우뚝 선 것이다.

일본은 어떠한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한국의 영토인 작은 섬 하나에 집착해 피해국인 한국과 영토분쟁이나 일삼고 있다. 침략의 치부를 손바닥으로 하늘 가리듯이 하며 소탐대실하고 있다.

2차대전 종전 70주년을 3년 앞둔 2012년. 독일 총리들은 여전히 유대인 희생자 위령탑을 방문, 참배하며 과거의 침략을 반성하고 있지만, 일본 총리들은 A급 전범들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고 있다. 나치를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 문양은 이제 영화에서나 볼 수 있지만 욱일승천기는 아직도 관중석에서 버젓이 나부끼는 이 불편한 진실…. 북한문제 등을 포함해 평화와 공영의 아시아를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민족주의를 국내정치적 목적으로 악용한다는 측면에서 한'중'일 삼국의 정치인들 모두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퇴행적 민족주의 악순환의 고리는 가해국 일본이 결자해지의 자세로 먼저 끊어 주어야 한다.

김재천/서강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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