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with라이온즈열정의30년] (39)'감독 무덤' 악명 이어간 대구구장

홈 더그아웃 1루로 옮겼지만 또 우승 좌절

삼성은 2000년 더그아웃을 3루에서 1루 쪽으로 옮겼다. 이승엽이 홈런을 친 뒤 1루 쪽 더그아웃에서 동료의 환영을 받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삼성은 2000년 더그아웃을 3루에서 1루 쪽으로 옮겼다. 이승엽이 홈런을 친 뒤 1루 쪽 더그아웃에서 동료의 환영을 받고 있다. 삼성 라이온즈 제공

호세 방망이 투척 사건으로 떠들썩했던 1999년 롯데 자이언츠와의 플레이오프서 믿기지 않는 패배를 당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이 좌절된 삼성 라이온즈는 또다시 새판 짜기에 나섰다. 서정환 감독이 지휘봉을 내려놨고, 그 후임으로 김용희 수석코치가 감독직을 넘겨받았다. 전수신 사장도 그해가 가기 전 한행수 사장에게 구단을 인계했다. 단장 자리도 김재하 이사로 교체됐다.

구단 수뇌부를 전격 물갈이 한 삼성은 우승을 빚어낼 '옥석' 영입에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해태 투수 이강철과 LG 포수 김동수를 각각 8억원의 돈뭉치를 안기며 불러들였고, 메이저리그 타격왕 출신 프랑코에게도 한국행 비행기 티켓을 보냈다.

1989년 해태에 입단한 이강철은 1999년 전지훈련 도중 십자인대 파열과 연골 손상으로 한 해를 쉬었지만, 1998년까지 10시즌 동안 연속으로 두 자릿수 승수를 기록했던 해태의 에이스였다. 김동수 역시 당시 최고의 포수로 평가됐고, 프랑코는 가장 화려한 스펙을 가진 외국인 선수였다.

그러나 이것만으론 부족했다. 새 옷을 입은 구단 수뇌부는 머리를 맞댔다. 원성이 높았던 팬들에게도 귀를 기울였다. 한국시리즈 우승만 할 수 있다면 어떤 대가도 치를 수 있다는 합의가 이뤄졌다.

해가 바뀐 2000년, 삼성은 홈구장으로 사용하던 대구시민야구장 더그아웃 교체를 결심했다. 삼성은 수억원을 들여 3루 쪽에 있던 홈 더그아웃을 1루 쪽으로 옮기는 공사를 단행했다. 삼성은 원년부터 1루 더그아웃에 비치는 햇빛 때문에 줄곧 3루 쪽을 사용해왔다.

1루 더그아웃은 여름이면 찜통이 되기 일쑤여서 선수들이 집중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그럼에도 자청해 더그아웃을 옮긴 이유는 단 하나였다. 3루 쪽 더그아웃이 운이 닿지 않는다는 풍수지리 전문가들의 견해 때문이었다.

당시 신임 단장이었던 김재하 대구FC 사장은 "우승을 못하는 원인을 찾던 중 대구구장 3루 더그아웃이 풍수지리상으로 기운이 좋지 못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됐다. 몇 명의 그 방면 전문가들이 내놓은 공통된 의견이었다. 예전에 내(川)가 흘렀던 자리라 우승을 하려면 피해야 한다고 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더그아웃을 이사했다"고 말했다.

완벽한 재정비였다. 이제는 그 한을 풀 것 같았다.

고대하던 개막전 SK에 일격을 맞았지만, 겨우내 노력은 곧바로 희망으로 바뀌었다. 삼성의 4월 한 달은 행복하기만 했다. 개막전 패배 후 삼성은 승승장구했다. 2차전부터 8연승을 내달린 삼성은 비록 9연승이 해태에 덜미가 잡혔지만 다시 3연승을 내달렸다.

4월 19일 인천 SK전에서 승리하며 8개 구단 중 가장 먼저 10승에 오른 삼성은 1986년 롯데, 1988년 OB가 가지고 있던 최단기간 10승 달성 기록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다음날인 20일엔 외국인 선수 스미스가 인천서 SK를 맞아 5회 2점 홈런을 때려내며 삼성의 팀 2천 홈런 도달을 알렸다. 1982년 동대문구장서 MBC 유종겸으로부터 삼성 이만수가 첫 홈런을 터뜨린 이후 2천105경기 만에 달성한 값진 축포였다.

대구 삼성팬들은 "올해는 미뤄놨던 우승 잔치를 하겠구나"라며 들뜬 표정을 감추지 않았고, 마치 우승이라도 한 것처럼 대구가 들썩였다.

그러나 이런 축제 분위기는 4월 끝자락서 급랭하고 말았다. 4월 26일 두산에 패하며 3연승이 끊긴 삼성은 전년도 플레이오프서 3승4패의 역전패를 안긴 롯데(28~30일)를 대구로 불렀지만 3패를 당했다. 연이어 현대에마저 3연승을 내준 삼성은 이후 7연패 충격에서 벗어났지만 순위는 이미 3위로 떨어진 뒤였다.

69승5무59패로 드림리그 3위로 정규시즌을 마감한 삼성은 준플레이오프서 매직리그 2위 롯데를 2승1패로 따돌렸으나 플레이오프서 현대에 한 번도 이기지 못하며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다.

삼성이 모아놓은 온갖 보석은 제각기 빛날 뿐 하나의 화려한 색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미끈한 겉모양과 달리 속을 들여다보면 바람이 숭숭 든 무나 다름없었다.

야심차게 영입했던 프랑코는 스미스, 김기태 등 기존의 타선 축과 포지션(1루수)이 겹쳐 효용 가치가 떨어졌다. 더욱이 삼성의 1루수 터줏대감은 이승엽이었다.

궁여지책으로 프랑코와 김기태를 외야로 돌렸지만 수비 불안만 가중됐다. 결국 스미스는 방출 통보를 받았다.

김동수는 안방을 차지한 진갑용의 그늘에 가렸고 이강철은 오른쪽 무릎 부상의 후유증을 털어내지 못해 2군에 머무는 기간이 많았다. 김상진마저 전지훈련 막바지 맹장 수술로 전반기 막판에야 겨우 마운드에 설 수 있었다.

1999년 수석코치로 팀의 한국시리즈 진출에 실패했음에도 신임을 받았던 김용희 감독은 취임식 때 "삼성은 기술로만 치면 어느 팀에도 뒤지지 않는다. 다만 근성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이를 키우는데 주력하겠다"며 의욕을 불태웠지만 시즌 초반부터 해태 김응용 감독 내정 설에 자유롭지 못했다.

플레이오프서 현대에 무기력하게 4패를 당하자 대구는 요동쳤다. 삼성이 짠 우승 프로젝트는 휴지통에 처박혔다. 김용희 감독은 책임을 떠안고 1년 만에 도중하차했다. 대구구장은 감독들의 무덤이라는 유행어가 또다시 회자됐다.

최두성기자 dschoi@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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