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최종문의 펀펀야구] 수석코치(상)

과학이 섬세하게 접목되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의 메이저리그나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아직까지 이뤄내지 못한 기록이 팀타율 3할이다.

개개인이 3할을 넘기기도 어려운데, 팀 전체가 타율 3할을 기록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나 삼성 라이온즈는 1987년 이 기록을 달성했다.

메이저리그(162경기)나 일본프로야구(144경기)보다 경기 수가 훨씬 적은 108경기에서 나온 것이라 세계 기록으로 내세우기에는 부족하지만 당시의 국내 환경을 감안하면 정말 놀랍고도 경이로운 업적임은 틀림없다.

이 대단한 기록의 탄생 비화에는 몇 년을 공들인 제갈공명 같은 지혜가 숨어 있었다.

1984년 삼성 라이온즈에 부임한 김영덕 감독은 당시 국내 최고의 타격코치인 박영길을 영입해 야심 차게 팀 재건에 나섰다. 박영길 코치도 원년부터 롯데 자이언츠의 감독이었지만 성적부진으로 1983년 후반에 강병철 감독에게 사령탑을 넘기고 현장에서 물러나 있던 터라 흔쾌히 응했다.

그리고 아마 시절부터 '우 (김)응룡' '좌 (박)영길'로 불릴 만큼 타격에서 명성을 날렸던 그라 기대도 컸다. 그러나 밀월은 오래가지 않았다. 막상 함께하다 보니 서로 타격 이론이 달랐던 것이었다.

정교한 타격을 원했던 김영덕 감독의 생각과 달리 중장거리 타자였던 박영길 코치는 배트를 쥔 팔을 쭉 펴 스윙궤적을 넓히며 비거리를 향상시키는 타법을 선수들에게 지도했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이 타법에 맞는 선수가 이만수 외에는 없었지만 박 코치는 지론을 굽히지 않았다.

장효조, 박승호, 허규옥, 홍승규, 김성래, 장태수 등 나름 타격에 일가견이 있던 선수들이었지만 자신과는 맞지 않는다고 대놓고 말하기엔 하늘 같은 대선배였고, 눈에 벗어날까 시늉만 하다 보니 불만이 조금씩 쌓여갔다. 그리고 끝내 이 사실이 김영덕 감독의 귀에도 들어갔던 것이었다.

가뜩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선수들에게 맞지 않는 타법을 강요한다고 하니 화가 잔뜩 난 김영덕 감독이 정동진 수석코치를 불러 당장 바꾸게 하라고 엄명을 내렸다.

그러나 지시를 받은 정동진 수석코치의 대답은 의외였다.

"감독님 지금 팀타율이 1위인데 뭐라고 하면 괜히 분란만 생기지 않겠습니까? 시기가 맞지 않으니 때를 기다렸다가 얘기하면 알아들을 것입니다.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듣고 보니 그랬다. 선수들의 마음과는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팀타율은 2할7푼대를 유지하며 1위였던 것이다. 그리고 시즌이 끝나도록 팀타율은 그 이하로 떨어지지 않았고, 끝까지 1위를 지켜냈다. 아무도 박영길 코치에게 내색하거나 언급할 수 없었다.

오히려 팀타율 1위의 공로에 대해 축하를 건네야 할 형편이었다.

이듬해가 되어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감독과 코치, 선수 모두에게 불편한 상황이라 그대로 넘어갈 분위기도 아니었다.

팀은 한국시리즈 참패를 극복해야 할 과제를 안고 있어 어떻게든 수습해야 할 상황이었다. 마침내 선수들을 집합시킨 정동진 수석코치가 묘안을 꺼냈다.

야구해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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