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거짓말쟁이예요!" 지난 총선 때 투표하지 않았다는 학생들에게 이유를 묻자 대뜸 나온 소리다. 대학에서 정치학을 가르치면서 곤혹스러운 것 가운데 하나가 정치인에 대한 '묻지 마'식 불신이다.
정치인의 거짓말엔 여러 이유가 있다. 하지만 손쉽게 설명하려면 각 직업군의 사람들에게 직업 선택의 이유를 물어보면 된다. 가령 사업가에게 묻는다면,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기 위해서'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선생님에게 물어도 '안정된 수입원이기 때문에'라 대답할 수 있다. 심지어 노벨상을 받는 학자도 '그냥 재미있어서'라 할 수 있다. 아무도 이들을 자기 개인의 부와 안정, 그리고 즐거움을 위해 일한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런데 정치인에게 물으면 사정은 사뭇 달라진다. 먼저 대답에서 모두가 입을 모아 '국가를 위해서, 정의 실현을 위해' 등을 이야기할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사적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희생하고 '대의'를 위한다는 취지다. 둘째, 듣는 사람의 반응도 전혀 다르다. 다른 직업인의 사익 추구를 당연시하던 사람들이 정치인에 대해선 분노의 욕설을 마다하지 않는다.
정치인도 사람인데 어떻게 사심(私心)이 없을 수 있을까. 하지만 다른 직업인과는 달리 솔직히 그것을 밝힐 수 없다. 사심을 은폐하거나 부인하지 않으면, 지지는 고사하고 힐난의 손가락질을 피하기 어렵다. 정치인이 거짓말하는 것은 직업의 특성상 사심을 버리고 오직 대의를 위해야 하는 공적 성격 때문이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개인적 욕심을 버린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일반 사람에게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그것이 일반적 기대다.
정치인을 위한 변명 같은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안철수 현상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홍사덕 전 의원이 "책 한 권 달랑 들고 나와서 대통령을 하겠다"는 '무례'를 꼬집었지만, 그래도 그에게 대중적 지지가 모이는 이유가 있다. 정치권에 대한 극단적 불신이 비정치적 인물에게서 깨끗한 정치를 갈구한다.
이 같은 과잉 불신의 반대편에 이명박 대통령이 있다. 지난 대선에서 홍준표 전 의원은 TV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명박 후보가 그렇게 많은 헐뜯음을 당하고도 지지율을 유지하는 이유가 난 거기 있다고 봅니다. 그 양반이 40년 경제인 생활을 했는데 어떻게 장사를 하면서… 도덕적으로 했겠느냐… 그런 측면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이 양반 지지율이 탄탄한 겁니다." 경제인은 그러려니 하는 체념이 이명박 후보의 청와대 입성을 도왔다는 것이다.
정치 불신 시대에 불신이 결벽증과 체념 중 어느 쪽으로 방향을 트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물에게 지지가 몰린다. '대쪽 판사' 이회창 씨가 '병풍' 한 방에 나가떨어진 것도, 정치계의 바보 노무현의 당선도 과잉 팽창된 불신의 여파였으며, 정수재단 문제와 '독재자의 딸'이라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박근혜 후보가 승승장구하는 것에는'어차피 백년하청인 정치판, 잘살게만 해준다면야…'는 체념적 태도가 뒤를 받치고 있다.
불신은 이처럼 결벽증과 체념을 오가며 갈피를 잡지 못하고, 그에 따라 정치판도 요동친다. 그래서 정치 불신이 한국 민주주의의 큰 문제라 지목되기도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근본적으로 '불신의 제도화'로 이루어졌다. 정치인을 믿고 권력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부패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권력을 나누어서 서로 감시'견제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권력분립의 원리는 결벽과 체념의 극단주의 대신 신중한 현실주의에 기초를 둔다. 정치인을 도매금으로 불신하여 정치적 무관심으로 일관하지 않고, 일단 믿고 맡기되 항상 관심을 갖고 감시하는 건전한 민주 시민을 이상으로 한다. 분립된 권력들의 견제와 균형, 그리고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건전한 현실주의적 불신에서 역동성을 얻는다.
정치 불신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현실감을 상실한 그것의 극단화가 이상주의적 열광과 체념적 방관을 교차시키기 때문이다. 자신도 몰랐던 작은 비리에도 목숨을 끊는 전직 대통령과 엄청난 의혹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정치인은 볼 수 있지만, 정작 온건한 현실주의자를 당선 가능성이 높은 후보군에서 찾기 어려운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다가올 대선에서 어떤 극단적 풍파가 어떤 정치인을 청와대로 몰지 자못 궁금하다.
이재정/대구대 교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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