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 보세요, 예쁘죠?"
인터뷰 도중 두 딸 이야기가 나오자 어둡던 최선영(가명'38'여) 씨의 얼굴 표정이 환해졌다. 그는 안방에서 휴대전화를 가져와 두 딸 사진을 취재진에게 보여주며 연신 자랑했다. "이건 둘째가 세 살 때 찍은 사진이에요. 어릴 때 눈이 커서 다른 사람들이 외국 아기냐고 물어봤어요." 남편의 폭력과 질병 그리고 가난까지, 최 씨의 삶은 삼중고에 짓눌려 왔지만 두 딸 때문에 벼랑 끝에서 희망을 간신히 붙잡고 있다.
-지우고 싶은 결혼 생활
3일 오후 대구의 한 주택가. 2층 단독주택이 빽빽이 들어서 있는 골목길에서 어렵게 최 씨의 집을 찾아냈다. 건물 2층에 있는 그의 집 현관에는 몇 호라는 번호조차 붙어 있지 않았다. "남편이 우리 집에 찾아올까봐 무섭다"는 최 씨의 두려운 심정이 집 입구에서도 드러났다. 그는 스물 한 살 때 남편(42)과 혼인신고를 했다. 일찍 어머니를 잃고 바깥을 나도는 아버지 때문에 힘겹게 자랐다는 남편의 힘든 가정사를 듣다가 친해졌고 교제 2년 만에 결혼을 결심하게 됐다. "외모도 멋지고, 말솜씨도 뛰어나고. 가정 형편은 어려워도 꿋꿋이 살아가는 남자를 보며 생활력도 있다고 느꼈고요. 하지만 모든 게 제 착각이었어요."
결혼 뒤 남편의 태도는 180도 달라졌다. 남편은 최 씨가 이해하기 힘든 행동을 반복했다. 집 밖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만 집에서는 이불 속에 식칼을 숨겨놓고 "함께 죽자"고 장난을 친다거나, 자신의 몸에 칼을 그으며 자해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첫째 딸 임수(가명'16)가 태어났을 땐 최 씨를 때리는 것은 물론 갓난 아기의 목을 조르기까지 해 최 씨는 남편의 비정상적인 행동에 몸과 마음이 멍들어갔다. 남편은 소리 소문없이 사라지기도 했다. '자신의 아버지처럼 살기 싫다'고 했던 남편은 아버지의 과거를 그대로 밟아가고 있었다. 남편의 두 번째 가출 후 귀가 때 최 씨는 마지막 부탁을 했다. "남편을 데리고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갔었어요. 그때 병원에서 '사이코패스'(반사회적 인격장애)가 의심된다고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어요. 하지만 남편은 자기 상태를 인정하지 않았어요." 치료를 거부하던 남편은 첫째 딸이 열 살 때 완전히 집을 떠났다.
-만신창이가 된 몸
망가진 결혼 생활 때문에 최 씨의 몸도 만신창이가 됐다. 보란듯이 혼자서 두 아이를 잘 키워낼 것이라 다짐했는데 몸은 자꾸 이상한 신호를 보냈다. 2005년 초부터 입 안과 생식기가 계속 헐고 염증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애기 엄마, 혹시 베체트병 아니야?" 큰 딸 학교에서 만난 한 학부모는 "자기가 앓고 있는 병과 비슷하다"며 당장 병원에 가보라고 했다. 그렇게 찾은 병원에서 최 씨는 베체트병 진단을 받았다. 이 병은 반복적인 구강 궤양과 외음부 궤양 등을 나타내는 만성 염증성 질환이다. 아직까지 베체트병의 단일 치료제는 개발되지 않은 상태며 증상이 악화되면 염증이 뇌와 폐, 심장 등 주요 장기를 침범하는 후유증이 발생할 수도 있다.
베체트병만 문제가 아니었다.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경련을 일으키는 질환인 '이형협심증'과 갑상성 질환인 '그레이브스병' 진단까지 추가로 받았다. 아픈 엄마 때문에 아이들은 일찍 철이 들었다. 최 씨가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둘째 딸 임선이(가명'12)는 엄마 곁을 지켰고, 첫째 딸 임수는 엄마가 없는 집을 혼자 지키며 학교 갈 준비를 했다. 첫째 딸이 열 살, 둘째 딸이 여섯 살일 때 일이었다.
- "두 딸이 내 희망"
최 씨는 특히 임수에게 미안한 것이 많다. 남편이 완전히 집을 떠났을 때 어느날 임수가 말을 내뱉었다. "아빠가 우리를 정말 버릴 줄 몰랐어. 아빠는 무서운 사람이야." 아빠의 사랑을 받아도 모자랄 나이에 임수는 아빠의 무자비한 폭력에 노출됐고 엄마를 때리는 주먹을 숨어서 지켜봐야 했다. 아이의 가슴 속에 곪은 상처는 아빠를 향한 두려움으로 변했고 열살 때 "하늘이 빙글빙글 돈다"며 학교를 한 달 이상 결석하기도 했다. "병원에 데리고 가니 '현훈증'이라고 했어요. 어른들이 잘 걸리는 어지럼증인데, 열 살 난 애가 이 병에 걸렸다고 하니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최 씨는 가진 것이 없다. 기초생활수급비로 받는 생계급여 90여만원으로 월세 30만원을 내고, 각종 공과금과 아이들 교육비, 생활비를 모두 감당한다. 특히 가난은 여름보다 겨울에 더 잔인하게 다가온다. 지난해 겨울에 도시가스 요금이 15만원 넘게 나오면서 월세가 밀렸고, 한 복지단체에서 긴급 자금을 지원받아 간신히 해결했다.
최 씨는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부족한 생활비를 쪼개 한 달에 한 번이라도 두 딸에게 맛있는 반찬을 사주려 애쓸 뿐이다. "아픈 엄마 때문에 밥하고 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집안 일은 다 애들 몫이 됐어요. 그런데도 학교에서 공부를 잘 해서 얼마나 기특한지 몰라요." 아이들 이야기를 할 때마다 최 씨의 얼굴에서 웃음꽃이 피어났다. 황수영기자 swimming@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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