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과 운명을 같이할 겁니까?"
4일 오후 9시 30분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절도사건 항소심의 마지막 재판이 끝날 무렵 재판장인 이진만 대구고법 제1형사부 부장판사는 절도 피의자 배모(49) 씨에게 의미심장한 한마디를 던졌다.
이 부장판사는 "피고인, 간곡히 부탁합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국가에 기증하세요. 해례본은 햇빛을 봐야 합니다. 깊이 생각해 보세요" 하고 말한 뒤 "피고인은 해례본과 운명을 같이하려고 합니까"라며 배 씨를 강하게 압박했다.
갑작스런 재판장의 말에 '해례본이 빛을 보지 못하면 피고인 역시 햇빛을 보지 못한다'는 것을 뜻하는 게 아닌지 의미를 해석하느라 법정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배 씨 역시 약간 움찔하며 '무슨 말이냐'며 진의를 되물었고 재판장은 "우수한 한글의 창제 과정을 기술한 소중하고 자랑스러운 해례본을 세상에 공개해 햇빛을 보게 하자는 의미"라며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만약 배 씨가 실형을 받게 되면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역시 빛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이날 공판에선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여러 묶음의 낱장으로 나뉘어 분산 보관 중인 것으로 드러나 관심을 끌었다. 배 씨는 이날 "현재 소장 중인 상주본은 20여 장짜리"라며 "상주시청에 문화재신청 절차를 문의하러 갈 때도 한 장을 신문지에 돌돌 말아 싸서 가져갔는데 지금도 여러 묶음으로 분리해서 분산 보관하고 있다"고 털어놨다.
이날 증인으로 나온 A 씨는 "2008년 7월 26일 아침에 배 씨가 전화해서 '(조모 씨의 골동품 가게인) 민속당에 해례본이 있는데 책이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줄 테니 같이 가서 사자'고 했다"며 "배 씨가 가면 조 씨가 팔지 않을 테니 나를 데리고 가 구입하려고 한 것 같다"고 증언했다. 또 "보통 관례상 구입자와 소개인의 몫은 5대 5여서 만약 그날 내가 내 돈으로 샀다면 그 정도로 이익을 분배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이에 배 씨는 "전화는 했지만 해례본이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고 응수하며 날 선 공방을 펼치기도 했다.
이번 사건은 선고 공판이 예고된 날(지난달 30일) 재판부가 직권으로 공판을 재개하고 일주일 새 네 번의 공판을 열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고 이번 주 구속 만기를 꽉 채워 선고하게 됐다.
검찰은 이날 지난달 9일 결심과 똑같은 징역 15년을 구형했고, 선고 공판은 7일 열릴 예정이다.
이호준기자 hoper@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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