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기념으로 하사했다. 누구든 방해하는 자는 용서치 않겠다." 일제는 총검을 겨눈 순사들을 동원해 저항하는 백성들을 진압하고 새빨간 거짓말로 군수를 협박했다. 마구 해체된 석탑은 수십 대의 달구지에 실려 기차와 배편으로 일본으로 빼돌려졌다. 통감부 시절인 1907년 벌어진 경천사 10층 석탑(국보 86호) 약탈의 전모다.
일본인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우리 문화재에 눈독을 들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고려자기 최대 장물아비로 손꼽혔다. 1906년 순종의 가례에 특사로 한국에 왔던 궁내대신 다나카 미쓰아키(田中光顯)도 그런 약탈자 중의 하나였다. 다나카는 1904년 양국의 우의를 두텁게 한 공로를 이유로 특별히 이화대수장(李花大綬章)까지 받았음에도 우리 문화재를 약탈하는 데 앞장섰다.
만행은 금세 소문이 났고 국내외에서 비난의 소리가 들끓었다. 1907년 3월 7일 자 대한매일신보는 "우리 황제께서 역사적으로 귀중한 그런 석탑을 내줄 의향이 없다고 거절하셨다는데도 특사가 흉계를 꾸몄다. 일본인들의 횡포한 행동을 역력히 드러낸 것이다"며 규탄했다.
1918년 석탑은 거의 누더기꼴로 한국에 되돌아왔다. 석탑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인 다나카의 행적에 대해 웬만한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서 알고 있다. 하지만 일본인들의 평가는 전혀 딴판이다. 정치가이자 내각서기관장, 궁내대신 등을 지낸 유신지사로 소개한다. 1909년 수뢰 혐의로 정계를 은퇴한 사실만 겨우 보일 뿐 문화재 약탈 범죄에 대해 언급한 기록이나 자료는 거의 없다. 대다수 일본인은 그가 일본 칠공회(漆工會) 회장을 지내고 문화사업에 적극 나선 인물로 기록할 뿐 그의 실체를 철저히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일본이 독도를 1945년 11월 국유재산대장에 올리고 공시지가까지 산정해 온 문서가 어저께 발굴됐다. 그런데 일본 외무성이 1953년 작성한 자료에 독도 주소를 '島根縣 隱地郡 五個村 獨島'라고 적었다가 같은 자료 28쪽에는 '獨島' 부분을 먹칠해 지운 흔적이 드러났다. 그들 주장대로 독도가 일본땅이라면 공문서에 독도라고 표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 제 땅이라는 영토 의식도 없이 독도라고 적었다가 문제가 될 것을 우려해 지운 것이다. 독도는 먹칠하고 다나카는 감춘다. 그러면서 스스로 선진국이고, 일본 문화는 세련된 문화라고 떠들어댄다. 우스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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