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은 12월 27일 교토(京都)에 도착한다. 대마도를 출발해 한 달여나 걸린 고된 여정이었다. 환갑을 넘긴 나이에 뱃길로 교토까지 가기는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탐적사(探敵使)로 막부의 동태를 살펴야 했고, 왜병에게 끌려간 포로들까지 송환해야 하는 부담감은 그를 걱정으로 잠을 설치게 했다.
'남도를 지나 관동으로 내려가니/ 하늘과 물이 맞닿아 아득하기 허공인 양/ 홀로 뱃전에 기대어 잠 꿈 이루지 못하니/ 가련하다 달빛 아래 외로운 그림자여'(주중야좌 중에서). 이처럼 사명은 복잡했던 심정을 시(詩)로 표현하며 마음을 달랬다.
교토에 입성한 사명 일행은 혼포지(本法寺)에 머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 회담을 준비한다. 그러나 회담은 곧바로 이뤄지지 않았다. 도쿠가와가 교토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도쿠가와는 3개월이 지난 이듬해 3월이 돼서야 사명 일행을 후시미조(伏見城)로 불러 회담을 연다. 그동안 사명은 혼포지에 머물며 일본의 승려와 학자들과 필담과 한시를 교환하며 교류를 가졌다.
◆혼포지(本法寺)에 머물며 시'문 남겨
구마모토에서 하늘 길을 거쳐 교토에 도착한다, 여장을 풀고 먼저 사명이 머물렀던 혼포지를 찾았다. 혼포지는 교토 도심 북쪽에 있다. 절에 도착하자 세가와 닛쇼 주지가 일행을 맞았다. 주지는 먼저 사찰 곳곳으로 일행을 안내했다. 잘 꾸며지고 다듬어진 정원이 전형적인 일본식 사찰이다. 스님은 절에서 소장하고 있는 괘불탱화와 센수쿄 화가가 그렸다는 렌게(蓮花) 그림 등 중요 문화재를 관람하는 특권까지 줬다. 이곳에는 국가지정 중요문화재 18점을 비롯해 200여 점의 문화재를 소장하고 있다. 이어 스님이 안내한 곳이 '도모에(巴) 정원'이다. 세가와 스님은 "혼포지는 1436년 창건, 호케(法華)의 난(1536년) 때 불에 타 이곳으로 옮겼다. 사명대사가 이 절에 머물렀으면 아마 '도모에 정원'이 보이는 이곳 선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조용하고 풍광이 아름다워 사절단을 이끈 사명이 머물기에 어울리는 곳이라고도 했다. 정원 마당의 복판에는 둥근 돌에 가운데 금이 그어진 일(日)자 모양의 돌과 연꽃이 자라는 연못을 배치해 이 사찰이 일련종(日蓮宗)의 교토 본산임을 일깨워줬다. 사명이 3개월을 머문 곳이라는 말에 행여 400년이 지났지만 '님의 체취(?)'라도 느낄 수 있을까 두리번거리며 살포시 정원을 거닐었다. 사명이 머문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선방은 단아하게 꾸며져 있어 절로 옷깃을 여미게 했다.
자리를 옮겨 주지 스님을 붙잡고 사명이 어떤 인연으로 여기에 머물렀는지 발자취를 찾아보려 했지만 이내 실망하고 말았다. 화재로 인해 사명이 남긴 흔적은 사라졌고 이름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구마모토 혼묘지 닛신(日眞) 스님이 같은 일련종이니 스님의 주선으로 이 절에서 머문 것 아니냐"는 추측성 질문에도 반응은 별로다. 혼묘지와 이곳 혼포지가 이름이 비슷하고 같은 불교 종파지만 왕래는 거의 없다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사명이 남긴 시에는 이곳 혼포지가 여러 곳에 등장한다. 사명은 12월 말에 이곳에 도착, 섣달 그믐밤을 지새우면서 '재본법사제야'(在本法寺除夜)란 시를 지어 이국(異國)의 정을 달랬다. '사해를 떠도는 이 늙은이(四海松雲老)/ 하는 일 뜻과는 서로 어긋났네(行裝與志違)/ 한 해도 오늘 밤이면 다하거늘(一年今夜盡)/ 만 리 길 어느 때나 돌아갈꼬(萬里幾時歸)/ 옷은 오랑캐 땅에서 비에 젖었고(衣濕蠻河雨)/ 시름은 옛 절 사립문에 닫혔구나(愁關古寺扉)/ 향 사르고 앉아 잠들지 못하니(焚香坐不寐)/ 새벽 눈이 또 부슬부슬 내리네(曉雪又비비: 비 雨 아래에 아닐 非)'. 사명은 또 도쿠가와 이에야스와의 회담이 언제 열릴지 모르는 답답한 심정에 혼포지 종소리를 들으며 '재본법사문종사회'(在本法寺聞鍾寫懷)란 시를 남겼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길을 나서니 절 입구 안내판 하단의 한글 설명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1604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조선'중국에 대한 침략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이 이에 반성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송운(사명)대사가 파견되어 왔다. 다음해 봄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후시미성에서 회견할 때까지 이 절에 체류하였다'는 내용이다. 사명의 발자취를 찾기 위해 한국인들의 발길이 잦아졌다는 말에 이젠 사명대사께서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유묵을 보관하고 있는 고쇼지(興聖寺)
혼포지에서 나와 큰길을 건너면 고쇼지(興聖寺)다. 이 절은 사명과 또 다른 인연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이 절의 주지인 나가토 겐코(長門玄晃) 스님은 처음에는 인터뷰에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일전에 한국의 모 방송국에서 취재를 해갔는데 자신이 말한 의도와 다르게 방송됐다는 불만이었다. 하지만 말문을 열고 분위기가 좋아지자 오히려 사명과 이 절과의 인연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 절의 초대 주지인 엔지(圓耳) 스님이 사실상 사명의 제자였다는 것이다.
엔지 스님은 조선의 큰스님인 사명이 혼포지에 머문 것을 전해 듣고는 사명을 무작정 찾았다. 그는 사명에게 그동안 수행(修行)하면서 해결되지 않던 '선(禪)에 대한 10가지 궁금증'에 대해 답을 듣기를 청했다. 이 절에는 당시 엔지가 쓴 서찰이 보물로 간직돼 있었다. 사명은 엔지 스님의 물음에 끝내 답은 하지 않았다. 답하지 않은 그것이 선에 대한 사명의 답이었다. 그러면서 사명은 "일본에도 공부하는 중이 있구나"라며 그에게 '무염'(無染)이란 법호와 '허응'(虛應)의 자(字)를 주었다. 엔지 스님은 사명이 교토에 머물 때 아침저녁으로 찾아 보살피며 사제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이곳 고쇼지에서 사명의 친필을 만날 수 있었다. 중국의 경산(經山) 대혜보각선사(大慧普覺禪師)의 전서체를 읽기 쉬운 해서체로 써 달라는 일본승의 부탁을 받고 찬문을 한 글과 오언시 족자 등 4점을 소장하고 있었다-국내에서는 지금까지 5점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사실과 달랐다. 특히 사명이 제자 엔지 스님에게 써 준 '虛應'이란 글씨는 절에서 유출된 것을 최근 되찾아 이번에 처음 언론에 공개했다. 사진 촬영도 허락해준 덕분에 귀중한 자료를 담을 수 있었다.
사명의 서체는 힘이 넘쳤다. 적진에 있으면서도 기상을 잃지 않은 사명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3개월간 머문 혼포지가 아니라 이곳 고쇼지에 사명의 유품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사제지간으로 맺어진 인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절은 혼포지와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데도 관광안내책자에도 나오지 않아 찾는 데 애를 먹었다. 여기에는 숨은 일화가 있다. 이 사찰을 짓는 데 재정적 지원을 한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는 1615년 반역자로 몰려 부인만 남겨 놓고 가족 모두가 처형됐다는 것. 이 절은 부인의 소유라고 해명해 가까스로 폐사(廢寺) 신세를 면했다. 하지만 반역자의 사찰로 낙인찍히는 바람에 아직까지도 크게 부흥하지 못하고 있고, 관광안내도에도 실려 있지 않다는 설명이었다. 후루타 오리베는 그때까지 오사카성에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도요토미의 아들 편에 서서 도쿠가와에게 반기를 들었던 인물이다.
◆조선통신사 유물도 소장하고 있어
소장한 유물까지 흔쾌히 공개한 나가토 주지는 소코쿠지(相國寺)의 지쇼인(慈照院)에 사명과 관련된 유품들이 있을지 모른다며 안내했다. 절은 고쇼지와 10여 분 거리였다. 그러나 찾아간 절은 문이 닫혀 있었다. 이 절 9대 주지인 '벳슈소엔'은 막부의 명을 받아 대마도에 파견돼 조선과의 외교문서 작성, 검열 업무를 담당했으며 1711년(숙종 37년) 도쿠가와 이에노부(德川家宣)가 쇼군으로 즉위할 때 축하사절로 온 조선통신사가 에도(東京)로 향할 때 동행하며 사절단 고관들과 한시와 필담을 나눈 기록과 진귀한 물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사명과는 무관했다. 더구나 절에서는 사전에 방문 문의가 없었다며 통신사의 기록조차 공개하기를 꺼려 다음을 기약하며 발길을 돌렸다.
일본 교토에서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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