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대구 중심에 있는 '국채보상운동공원'을 산책한다. 옛적 나의 모교 대구여중이 있던 자리다. 졸업한 지 20여 년. 이제 나이 사십이 넘어, 엄숙한 공원으로 이름 바뀐, 옛 나의 모교 자리,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책을 하며 어떤 운명적인 생각에 옷깃이 여미어지기도 한다.
'나의 살던 고향은 대구'라고 하려니, 어쩐지 우리네의 '고향 정서'에는 안 맞는 것 같다. 고향은 뭐 꼭, 어느 시골, 봄이면 꽃피고 여름이면 녹음 우거지는 그런 순박한 시골마을, 기차 타고 버스 타고 한참 가야 하는 그런 곳이라야 하나?
내 '고향'은 대구 북구 고성동이다. 대구 한복판에서 나고, 자라고, 어른이 되고. 대구사랑, 고향사랑은 더욱더 짙어지고 깊이 빠지고 있는 대구 사람이다. 끊임없이. 아니 급속도로 바뀌는 시대와 사회의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고향이 모두가 도시로, 대도시로, 서울로, 서울로 보다 낳은 내일을 꿈꾸며 몰려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시대변화, 사회 변화 속에서 그럼에도 의연히 고향 대구에서, 대구 사람으로 살고 있고, 그것이 나의 기쁨이고, 자랑이고, 보람이다.
대구의 도심/ 골목이 1,000여개나 있답니다/ 골목에 들어서면/ 옛날 서민문화가 타임 캡슐에 담겨/ 반세기 전으로 시간이동 한답니다/ 골 기와집, 적산가옥, 블록담장, 벽돌 담장…/ 길모퉁이 맨드라미, 활짝 핀 접씨 꽃/ 연탄 냄새 가득함은 사라지고/ 울밑에 선 봉선화 다 져버렸지만/ 빛바랜 집들이 그때를 회상하게 합니다/ 나는 골목길과 즐겁게 이야기하며/ 함께 걷고 있습니다./ 지난 추억 가득한 도심의 골목/ 대구의 밝은 날들/ 희망을 꿈꾸는 미래를 봅니다. (필자의 시집 "젊은 골목길"에서)
고향이란 지리적 고향, 정신적 고향이 있다. 불혹의 사십대에 접어든 나는 옛적 초등학교, 중학교 시절. 70년대, 80년대의 모습과 정서를 오늘의 시대변화에 가끔 비추어 보면서 사연 넘치는 대구의 길, 골목길들을 걸으면서 남달리 고향의 감회에 젖곤 한다.
나는 할머니의 품에 안겨 할머니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할머니 집은 시민운동장 옆 고성동에 있었다. 옛날엔 번화한 동네였는데, 지금도 30년 전과 똑같다. 유달리 그곳만 개발이 되지 않아 옛날 흔적은 있지만 마음 아프다.
집 근처엔 수영장이 있었다. 시민운동장 수영장이었다. 한마디로 "와글, 와글"이었다. 대중목욕탕과 흡사했다. 위생이고 뭐고 따질 것도, 따질 수도 없는. 그러나 중심지에는 하나밖에 없다는 '최고 문화시설'이어서 한없이 자랑스러웠다. 수영장에 뛰어들어 몇 시간이고 뛰어놀고, 그리고는 눈병 걸리고 귓병 걸려 나와도 즐겁기만 하던 시절이었다. 옷을 소쿠리에 담아놓고 몇 시간이고 놀다 와도 없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요즘 스포츠센터의 철통 같은 '라커룸'을 보면 문득 옛 생각이 들곤 한다.
나는 6살 때부터 학교에 가고 싶다고 졸라댔다. 초등학교는 콩나물시루, 한 반이 70명 이상이었다. 16반, 17반까지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기도 했다. 오전, 오후반이 헷갈려 가끔 헛걸음질하던 시절이 추억스럽다. '주번'이라는 것이 있었다. 주번은 교실 뒤에 놓아둔 큰 주전자에 일주일간 물을 떠다 놓아야 했다. 우리 할머니는 내가 주번이 되면 주전자에 보리찻물을 끓여 얼음까지 둥둥 띄워 학교까지 갖다 주셨다. 보통 땐 수돗물로 채운 주전자에 물이 항상 남아 있었는데 내가 주번인 날엔 금방 물이 동났다. 그때는 할머니에게 고맙다는 말씀 제대로 못 드렸지만 지금 나에게 아름다운 할머니 생각으로 소중히 남아 있다.
나는 고향을 생각하면 연탄이 떠오른다. 구멍이 퐁퐁 뚫린 연탄 두 장이면 겨울밤을 따뜻하게 넘기던 시절이었다. 가끔은 연탄 가는 시간을 놓쳐 싸늘한 방이 된 이웃집 새댁이 우리 집에 급히 와서 연탄불을 빌려가곤 했다. 연탄불 인심이 훈훈한 동네. 솜씨 좋고 인심 좋은 아주머니들이 그립다.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은 아이들이 간혹 연탄가스를 마셔 못 일어나기도 한 것이다. 그때는 응급실을 찾는 것이 생활시스템 속에 없었다. 옆집에 급히 알리면 집집마다 장독대에서 동치미 국물을 한 사발씩 퍼서 달려와 "영희야~영희야~ 마셔라" 하면서 볼을 '탁~탁' 때리면, 어질어질 일어나 세수하고 학교에 가곤 했다. 생각하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만 그땐 그렇게 살았다. 나도 한두 번 동치미 국물 신세를 졌다. 그런 시절을 겪으면서 오늘의 따뜻한 난방, 시원한 냉방시대로 온 것이다. 전기난방 도시에서 나고, 살아온 요즘 세대들은 그런 스토리를 알기나 할까?
그 시절 우리 동네에서 시내로, 번화가로 나가는 길목에 경양식집이 하나 있었다. 동네 사람들은 그런 멋진 경양식집에는 들어가 볼 엄두도 못 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친척 오빠가 나를 평생 처음으로 그 경양식집에 데려갔다. 돈가스를 사준다 했다. 자그마한 레스토랑이었지만 내 눈엔 궁궐 같았다. 허름한 한옥에서 지내온 대구 북구 '촌닭 소녀'는 레스토랑의 번쩍거리는 인테리어와 고급 의자에 주눅이 들었다. 일주일 동안 외웠던 '오른손에 칼, 왼손엔 포크'를 레스토랑에 들어서는 순간 다 잊어버렸다. 먼저 나온 '크림수프'는 적당히 먹었는데 처음 보는 돈가스를 썰다가 소스가 특별히 입고 온 하얀 원피스로 튀어버렸다. 너무 부끄러웠다. 양식을 마치고 나올 즈음 카운터 분위기를 보고 '이 레스토랑 비싼 곳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어릴 적 배운 시골쥐, 서울쥐 생각이 문득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돈가스는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말이었다. 10대 소녀는 그날 처음으로 경제관념이 생겼다. 그 시절의 소중한 경제 메모리는 지금도 큰 의미로 내게 남아있다.
옛적에 내 고향 대구에는 한옥집, 양옥집. 그리고는 중심가의 나지막한 상가건물들, 그나마 최고 빌딩이 옛적 '미나까이' 4층 건물 정도였는데, 이젠 무수한 고층 빌딩들, 그리고 교복의 다양화, 두발 자유화, 옷 색깔도 다양화 시대로 변했다. 모두 단순 모드에서 다양화로 너무나 빠르다. 이제 흑백에서 컬러TV로, 또 컴퓨터시대로, 스마트시대로, 기차는 KTX 시대로, 그리고 글로벌 도시로.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어느 것 할 것 없이 정신없이 변화하고 있다. 그러나 나에겐 '내가 살던, 그때 그 시절'이 나의 자존심과 긍지로 영원히 함께 갈 것이다.
나의 고향, 나의 사랑, 대구. 나는 영원히 대구 사람이고 싶다.
오정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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