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온이 '뚝' 떨어지기 시작하는 이맘때면 여름내 시들했던 입맛이 살아나기 시작한다. 바야흐로 말도 살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 그러나 한번 떨어진 입맛이 다시 돌아오기는 쉽지 않다. 신선한 재료, 뛰어난 음식 솜씨가 있다 하더라도 음식에 맞는 적절한 온도를 찾지 못한다면 음식의 참맛을 알기 어렵다. 정성들여 차린 밥상을 아이들이 외면한다면 한 번쯤 음식에 맞는 온도를 고민할 필요가 있다. 음식 맛엔 온도의 비밀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최근 식음료에 따라 제각각인 맛있는 온도를 찾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뤄지고 있고 대부분의 음식들이 제 짝(온도)을 찾은 상태다. 게다가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식품업계가 최적온도를 강조한 제품을 잇따라 선보이며 '온도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맛있는 온도를 찾아라
식음료와 궁합이 맞는 온도를 찾는 것은 식음료업계의 오랜 과제였다. 그러나 식품영양학자들과 식음료업 종사자들의 오랜 노력과 연구 끝에 최근 대부분 음식의 맛을 내는 최적 온도를 찾은 상태다.
'국물이 끝내주는' 최적 온도는 60~65℃이다. 이 온도에서 탕에 들어간 음식재료와 수분이 가장 잘 융합되기 때문이다. 양념도 자기 맛을 충분히 낼 수 있는 온도다. 쇠고기 등 고기를 구워먹을 때는 이보다 조금 높은 70~80도가 최적온도다. 이 온도에서 육질이 가장 향기롭고 맛이 있으며 신선하고 부드럽다. 수박은 8~10도에서 가장 맛있다. 이 온도 이하가 되면 달콤하고 사각사각한 맛이 나지 않으며 더 높으면 변질이 쉽고 갈증을 해소하는 맛이 사라진다.
물맛은 13도일 때 가장 맛있다는 것이 식품업계의 정설. 깊은 우물의 물이 시원하고 맛있게 느껴지는 이유 역시 온도가 13도에서 15도 사이이기 때문이다. 반면, 물이 가장 맛이 없는 온도는 35~40도이다. 우리의 체온(36.5~37도)과 비슷해 혀가 느끼는 감각이 무뎌지기 때문이다.
최근 주류제조업체 하이트 진로는 주류상식 책자를 통해 여름에는 4~8도, 겨울에는 8~12도가 맥주를 가장 맛있게 즐길 수 있는 온도로 권고했다. 너무 차면 거품이 일지 않을 뿐 아니라 맛도 느낄 수 없고 시원하지 않으면 거품이 많아 쓴맛이 남기 때문이다. 이미 하이트 맥주병에는 수년 전부터 맥주맛이 가장 좋은 7~8도 상태를 표시하는 라벨을 부착해 온도 마케팅을 시작했다.
반면, 소주는 음식과 조화에 따라 8~12도를 권하는 주류회사가 있는 반면, 5도가 가장 부드럽고 목 넘김이 좋다고 권하는 업체도 있다. 진로 참이슬은 8도에서 두꺼비 마크가 부각되도록 했고, 보해는 7도에서 잎새가 변하도록 했다.
특히 열대기후 과일을 먹을 때는 온도에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열대기후에서 자란 파인애플, 망고, 바나나를 냉장고에 넣어 두면 껍질에 검은 반점이 생기고 과육이 검게 변한다. 열대과일은 가장 먹기 좋은 맛의 온도 역시 이 기후에 맞춰져 있어 인위적으로 차게 하면 오히려 맛이 떨어진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이다. 동물이 외부온도에 맞춰 땀의 배출량을 조절하듯이 과일 역시, 온도가 낮아질수록 세포막이 얇아지는 특성을 지닌다. 열대 과일은 10도 아래에서 세포막이 얇아져 칸막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고 세포막으로 분리됐던 화학물질이 섞이면서 갈색이나 검은색으로 변하게 된다.
◆온도와 맛의 과학
음식과의 궁합은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경험칙에서 나오는 통계학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과학적으로 증명하려는 노력이 있다. 그중 가장 고전에 속하는 것은 베케시의 '맛의 이율성설'. 혀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은 단맛, 쓴맛, 짠맛과 신맛 등 기본적인 맛의 감각 이외에 차거나 뜨겁다는 두 가지의 온도감각을 느낄 수 있다. 따라서 맛은 기본적인 맛의 감각과 온도감각이라는 서로 성질이 혼합되거나 융합되어 형성된 감각으로 볼 수 있다는 것.
특히 온도와 오감 사이에는 궁합이 있다. 뜨겁다든지 따뜻하다는 느낌은 쓴맛, 단맛들과는 잘 융합되나 짠맛, 신맛과는 융합되지 않는다. 한편 찬 느낌은 짠맛, 신맛과는 잘 융합되지만 쓴맛, 단맛과는 융합되지 않고 서로 독립적으로 느껴진다고 설명한다.
다만, 맛에 대한 온도의 영향은 일정하지 않으며, 여러 연구자들의 실험결과도 일치되지 않는다. 대략적으로 온도 상승에 따라 단맛은 잘 느끼고 짠맛과 쓴맛은 잘 느끼지 못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구체적으로 단맛은 우리 체온과 비슷한 36~38도에서 가장 강하며, 너무 뜨겁거나 차가워지면 단맛을 약하게 느낀다. 특히 단맛은 온도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다. 단맛은 침에 함유된 아밀라아제 효소가 당분을 포도당과 과당으로 분해한 것을 혀의 미뢰가 느끼는 것으로 효소가 가장 활발히 활동할 때 단맛도 많이 느껴진다. 짠맛은 온도가 높으면 짠맛을 느끼는 강도가 둔해진다. 그래서 음식이 식으면 짜게 느껴지므로 간을 볼 때는 식혀서 봐야 한다.
신맛은 온도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으나 아주 차게 되면 더 강하게 느껴진다. 과일을 사서 냉장고에 보관을 하게 되면 실온의 과일보다 신맛이 더 강하게 느껴지는 이유이다. 쓴맛은 온도가 높을 때는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식은 음식이 맛이 없다고 느껴지는 이유도 쓴맛이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감칠맛은 미지근할 때 느낄 수가 있고, 국물의 온도가 너무 높으면 느끼기 어려워진다. 김미향 수성대학교 식품영양학과 교수는 "대체로 온도가 상승함에 따라 단맛에 대한 반응은 증가하며, 짠맛과 쓴맛에 대한 반응은 감소한다. 다만, 인간의 혀가 가장 민감한 온도는 20~40도로 체온과 25도 이상 차이 나는 경우 자극이 커지면서 불쾌하게 느낄 수 있다"고 설명한다.
◆온도와 매출의 함수관계
온도와 제품에도 궁합이 있다. 온도가 너무 높아도, 그렇다고 너무 낮아도 매출엔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온도에 따라 매출은 춤을 추며 쌍곡선을 그린다. 제품마다 잘 팔리는 온도가 제각각인 셈이다. 온도가 마술을 부린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최근에는 까다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식품업계 역시 최적온도를 강조한 제품을 잇따라 선보이고 있다. 간단한 숫자로 제품의 장점을 쉽게 알릴 수 있어 기업들이 특정온도를 마케팅에 이용하고 있는 이른바 온도 마케팅이 치열해지고 있다.
동아백화점 황보성 홍보팀장은 "제품마다 수요가 급격히 변하는 시점의 온도는 따로 있는 만큼 기온과 판매율의 상관관계를 분석해 이를 마케팅에 이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고 말했다.
빙과업계와 음료업계에 따르면 18도에서 25도 사이에는 주로 떠먹는 아이스크림과 콘류가 잘 팔린다. 또 25~28도는 유지방이 함유된 바 형태의 제품이, 28~30도는 딱딱한 바 형태의 '하드'가 인기를 끈다. 30도를 넘어서면 음료가 시장의 대세로 떠오른다. 인체는 기온이 높아질수록 갈증이 생기고 이를 해소하는 데는 음료나 음료에 가까운 것을 찾게 된다. 20도대의 약간 더운 날씨에서는 시원하면서도 달콤한 빙과류를 선호하지만 무더위에서는 갈증을 해소하는 음료가 잘 팔린다.
톡 쏘는 상쾌함이 매력인 코가콜라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온도는 영상 3도. 이 온도에서 탄산의 양이 가장 적당해 짜릿한 맛을 느낄 수 있고 병이나 컵을 잡았을 때도 시원함을 더해 콜라를 더욱 상쾌하게 즐길 수 있다. 콜라 회사들도 이를 위해 '콜라를 맛있게 먹는 법' 등을 홍보한다.
유통업체 관계자에 따르면 소주는 기온이 6~10도, 양주는 0~5도 사이일 때 제일 많이 팔린다. 20도를 넘어서면 소주와 양주 모두 매출이 줄어든다. 맥주의 경우 0도를 기준으로 했을 때 11~15도로 기온이 오르면 매출이 28%가량 늘어난다. 심지어 기온이 30도 이상이 되면 매출은 0도일 때보다 70% 이상 폭증한다. 유리그릇과 보리차'살충제'수박'양산 등 대부분의 제품에도 임계온도는 따로 있다. 청량감을 주는 유리그릇은 보통 일 최고 기온이 18도를 넘어야 팔리기 시작한다. 냉국수와 아이스크림'주스'보리차 등은 25도와 궁합이 맞다. 26도가 되면 벌레가 많아지기 때문에 살충제가, 27도 이상이면 수박이, 28~29도에선 양산이 인기를 끌게 된다.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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