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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무'의 시대… 춤, 한민족 5천년 유전자야∼

대구 동성로에서 청소년들이 모여 가수 싸이의
대구 동성로에서 청소년들이 모여 가수 싸이의 '강남스타일' 안무를 따라하고 있다. 정운철기자 woon@msnet.co.kr

중국 역사책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한국인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낸 뒤 며칠 동안 술을 마시고 밥 먹고 노래 부르고 '춤춘다'고 기록돼 있다.

외국인들이 한국에 와서 놀라는 것 중 하나가 '음주가무'(飮酒歌舞) 문화다. 한국인들은 모였다 하면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춘다는 것.

다시 삼국지 위지 동이전으로 돌아가보자. 먼저 '남녀군취 상취가무'(男女群聚 相聚歌舞)라고 기록돼 있다. 남녀가 서로 모여 노래와 춤을 즐긴다는 것. 그 다음 기록을 보자. '답지저앙'(踏地低仰)은 제자리에서 발을 구르며 뛴다는 의미다. '수족상응'(手足相應)은 서로 조화되게 손과 발을 놀린다는 의미다. 한국인은 노래와 춤 모두 좋아한다는 얘긴데 춤에 방점이 좀 더 많이 찍혀 있다.

춤은 한국인의 오래된 유전자다. 옛적부터 한국인은 감흥을 춤으로 표현하길 좋아했다. 그런데 춤의 유전자가 혼자 있을 때 발현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모여야' 춘다. 그러면서 신명을 느끼고 정도 나눈다. 바로 '군무'(群舞'여러 사람이 무리지어 추는 춤)다.

◆군무의 매력은?

최근 온라인과 오프라인 모두 뜨겁게 달군 군무가 있다. 가수 싸이가 부른 '강남스타일'의 핵심 안무인 말춤이다. 뮤직비디오와 무대 위에서 싸이는 여러 명의 백댄서들과 함께 말춤을 춘다. 흥겨운 음악에 따라하기 쉬운 말춤이 인기를 끌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미국'유럽'동남아시아 등 외국에서도 패러디할 만큼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강남스타일을 패러디한 '대구스타일'도 최근 인기를 끌었다. 대구지역 전문 안무팀 '재미엔터테인먼트' 멤버들이 원곡 가사를 대구 사투리로 바꾼 다음 군무를 춘 동영상이 온라인에서 전국적인 인기를 끈 것.

이들은 군무의 매력으로 '전파의 원리'를 들었다. 이들은 "싸이가 춘 말춤을 우리만의 스타일로 재해석해 군무로 표현했다. 그런데 우리가 춘 군무를 보고 남녀노소 다양한 사람들이 즐거워하고 또 따라한다. 결국 군무가 또 다른 군무를 낳으며 세상에 커다란 군무가 만들어지는 것이 군무의 매력"이라고 말했다.

◆아이돌 군무가 대세

우리나라에서 군무가 유행을 타고 전파되는 토양은 대중가요계다. 특히 아이돌 그룹이 펼쳐보이는 화려한 군무가 대표적이다.

우리나라 초기 아이돌 그룹은 인원이 2~5명으로 적은 편이었고, 안무도 어설펐다. 무대 위에서 그저 귀엽고 깜찍하게 몸을 흔드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최근에는 소녀시대(9명), 슈퍼주니어(13명) 등 많은 인원의 아이돌 그룹들이 잘 짜여진 안무를 무대 위에서 펼쳐 보이고 있다. 대중들은 TV만 켜면 완성도 높은 군무를 쉽게 접할 수 있다.

그러면서 최근 화두가 되고 있는 것이 아이돌 그룹의 '칼군무'다. 소품으로 칼을 들고 춤을 추는 것은 아니다. 칼처럼 '착착' 들어맞는 고난도의 안무를 가리키는 신조어다. 물론 이전에도 아이돌 그룹의 안무는 정확한 통일성으로 유명했는데, 여기에 기술적인 정밀함을 더욱 강조한 것이다. 남성 아이돌 그룹의 칼군무는 마치 무사나 군인들의 제식을 춤으로 승화시킨듯한 터프한 카리스마가 특징이다. 슈퍼주니어, 인피니트, 틴탑 등이 대표적이다. 여자 아이돌 그룹의 경우 각선미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시원한 느낌을 주는 것이 특징이다. 소녀시대 군무의 전매특허다.

이러한 흐름에 대중들은 더욱 큰 감흥을 얻고 있다. 일부 아이돌 팬들은 칼군무를 추는 아이돌 그룹의 동영상을 보고 온라인에서 분석하고 토론한다. 그래서 기획사도 소속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는 물론 안무 연습 동영상도 공개해 이슈를 타려고 노력한다.

한때 아이돌 그룹을 두고 립싱크 등 가창력 논란이 불거졌지만 요즘은 다른 모습이다. 완성도 높은 군무가 아이돌 그룹을 평가하는 '대세'의 기준이 됐다.

◆군무의 민족사

사실 군무는 '춤'의 범주에서 조금 확장해 '함께 어우러지는 몸짓'으로도 정의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군무는 우리 민족사와 함께했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의 군무는 제천의식 속 한 형식으로 출발했다. 중국 길림성에 있는 고구려 고분인 무용총에 있는 '무용도'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무용총이라는 고분 이름은 이 그림이 발견되며 붙여진 것이다. 그림 속에서 고구려 남녀가 대열을 지어 추는 군무는 '소매춤'이다. 이 춤에 대해 학계에서는 "다리보다 팔을 많이 사용하는 것은 조선 춤의 특징"이라고 본다. 이외에도 삼국시대 풍류도나 고려시대 연등회 등에서 음주가무를 즐길 때 반드시 군무가 들어갔다.

이들 공통점은 집단의 안녕을 기원하며 개인의 즐거움도 함께 얻는 군무였다는 것. 그 전통은 조선시대 남도 지역의 여성 군무인 '강강수월래'로 이어졌다. 강강수월래(强羌水越來)를 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강한 오랑캐가 물을 건너온다"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남해안에 사는 여성들이 왜군이 쳐들어오는 것을 감시하다가 군무를 추며 노랫말로 불렀다고 한다.

근대로 넘어오면서 우리 민족이 추던 군무의 의미는 조금 경직돼버리고 만다. 집단의 의미는 강조된 반면 개인의 의미는 주변부로 밀려난 것. 대표적인 예가 '국민체조'다. 1961년 5'16군사정변 이후 정부는 체조를 통해 국가 재건을 이루겠다며 '재건체조'를 보급했다. 국민체조는 재건체조의 바뀐 이름이다. 국민체조는 일제강점기 군대식 체조를 계승했다는 평가와 국민들을 동원해 억지로 시킨 동원형 체조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권위적인 정부 아래에서 군무는 집단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러던 것이 민주화를 거치며 개인의 의미를 회복하기 시작했다. 호각과 구령 소리에 맞춰 뻣뻣하게 팔을 벌리고 무릎을 구부리던 국민체조는 학교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시켜서 추는 군무는 이제 옛날 일이 됐다.

◆거리로, 온라인으로. 군무의 진화

최근 개봉한 미국 영화 '스텝업 4'는 젊은 춤꾼들이 스트리트 댄스'무용'힙합 등을 결합한 군무로 사회적 메시지를 표현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그런데 극 중 출연진들이 군무를 표현하는 곳은 무대 위가 아니라 '거리'다. 바로 '플래시몹'이다.

플래시몹의 본래 의미는 '불특정 다수 사람들이 온라인 등을 통해 시간과 장소를 정한 뒤 한꺼번에 만나 즉석모임을 갖고 약속한 특정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특정 행동'으로 선호되고 있는 것이 군무다. 군무가 추기에도, 보기에도 제일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 플래시몹이라고 하면 '모여서 군무를 추는 것'으로 통하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도 대구 동성로 등 인파가 몰리는 도심에서 플래시몹을 열고, 군무를 추는 모습을 이따금 볼 수 있다. 지난달 15일 광복절에도 동성로 대구백화점 본점 앞 야외 무대에서 '독도는 우리 땅' 노래가 울려퍼지며 시민 300여 명이 신나게 몸을 흔들었다.

플래시몹 군무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대체로 이렇다. 당일 전문 안무가들이 맨 앞에서 춤을 추면 이를 보고 시민들이 뒤에서 따라 추는 방식이다. 일부 시민들은 인터넷 블로그를 통해 플래시몹이 열리는 시간과 장소를 미리 확인하고는 공개된 동영상을 보고 안무를 연습한 뒤 참여한다.

이렇듯 '쉽고 재미난 참여'가 시민들에게 매력을 끌면서 3'1절이나 광복절 등 기념일에 독도 등 관련 주제로 열리는 플래시몹은 아예 정례 행사가 됐다. 플래시몹에 여러 번 참가해봤다는 김유정(16'여'대구 달서구 용산동) 양은 "심각한 주제를 계기로 플래시몹이 열리지만 그 의미는 되새기되 표현은 신나는 군무로 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고 말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거의 없는 온라인에서는 더 많은 군무의 향연이 펼쳐진다. 각종 UCC 콘테스트나 뮤지션 오디션에 참가하고, 대학 동아리'직장인 소모임 등이 자신들을 홍보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모여 군무를 추고 동영상으로 만들어 올리는 경우가 많다. 혼자보다는 여럿이 춤을 춰야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어서란다.

이렇듯 군무는 사회적 메시지든 개성이든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는 현대인의 '몸짓 미디어'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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