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한준희의 교육 느낌표] 살아는 있니?

한때 젖은 구두 벗어 해에게 보여주곤 했을 때/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아무 데서나 길을 내려서곤 하였다/떠나가고 나면 언제나 암호로 남아 버리던 사랑을/이름 부르면 입 안 가득 굵은 모래가 씹혔다(이문재의 시 '길에 대한 독서' 중에서)

사실 부치지 않은 편지보다는 부치지 못한 편지가 훨씬 많다. 아픈 사람들에게 보내는 아픈 마음들이 내 안에서 정리되지 못하고 결국 부치지 못한 편지로 바뀔 때가 많았다. 부치지 못한 편지는 내 안의 상처로 남아 때때로 나를 힘들게 했다. 그럴 때면 어둠에도 매워지는 푸른 고추밭 같은 심정으로 걷던 길에서 내려설 때가 많았다. 떠나고 나면 언제나 만남은 암호로만 남고 그리운 이름을 부르면 언제나 입 가득히 모래가 서걱거렸다.

아무리 바빠도 이번에는 휴가는 떠나자는 심정으로 서해로 길을 떠났다. 부치지 못한 편지처럼 나를 힘들게 하던 마음의 무게도 덜어내고 싶었다. 여행은 늘 그렇다. 그리움도 외로움도 덧없이 노곤했다. 포구에서 끊어진 길을 싣고 섬으로 들어섰다. 해진 옷에는 사람의 소금기가 엉기고 덧없이 흘러간 시간들이 덩그러니 거기에 묻어 있었다.

지난 시간들이 불현듯 그리웠다. 아이들과 함께 책을 만들고 그것이 꿈으로 자라던 그 시간이 그리웠다. 그리움에도 유전자가 존재할까? 그리움이라는 세포를 분석하면 그리움의 게놈 지도를 찾을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이미 그리움이 아닐 게다. 그리움은 분석할 수 없는 마음이다. 나비를 보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을 내밀지만 바로 날아 가버릴 때의 작은 안타까움, 허무함, 분노, 슬픔. 그리움은 그 모든 것이 혼합된 마음이다.

아이들과 함께 보냈던 시간들은 누가 뭐래도 나에게는 그리움이다. 그 그리움을 버리고 어렵게 택한 지금의 길. 하지만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다시 펴보는 지도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을 때가 많았다. '이제 어디로 길을 걸어야 하나'하는 마음으로 어지러울 때가 많았다.

여행에서 만난 오랜 후배가 그랬다. "처음에는 다들 그렇지요. 교육의 본질에 대해 고민하더라구요. 하지만 선배가 앞으로도 지금과 같을 거라는 믿음은 솔직히 없어요. 정책을 기획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렇게 변해가더라구요. 과정보다는 결과를, 내용보다는 형식을, 목적보다는 수단에 집착하더라구요. 가장 무서운 진실은 자신이 그렇게 변했다는 사실을 정작 자신은 모르고 있다는 점이지요. 선배는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래요." 후배의 말이 잔잔하게 내 속으로 들어왔다. 슬프게 편집된 창밖의 풍경이 불현듯 어둠 속에서 고요했다.

'그래도 때가 되면 모든 것은 제 길을 찾아 흐른다'라고 누군가가 말했다. 위로하는 말인데도 마음이 아팠다. 내가 걷는 길에 둑을 쌓아 담을 만들거나 철조망으로 경계선을 만든다고 해도 오히려 그런 장애가 담 너머 길에 대한 그리움을 더 강하게 키울 뿐이다. 내 그리움이 향하는 방향은 여전히 아이들과 학교다. 내가 정책을 기획하고 집행한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길은 내 그리움의 대상으로 향할 수밖에 없다. 그것이 내 존재 이유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러한 나의 그리움은 후배의 말처럼 영원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법 많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사실이든, 진실이든, 그 무엇이든 함부로 언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 모든 기억은 내 편의대로 조작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결국은 내 상처로 남는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진실 하나는 간직하고 싶다. 아이들의 행복을 위해 앞으로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 그 마음이 영원했으면 하는 바람. 비가 다녀간 다음의 후텁지근한 바람이 불어오는 창가에 우두커니 서서, 우연히 읽은 어느 시 한 구절에 마음이 아렸다. '살아는 있니?'

한준희 대구시교육청 장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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