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도의 큰 고을이었던 내 고향 상주는 옛날부터 삼백(三白)의 고장이라고 불린다. 삼백은 세 가지 특산물인 곶감과 쌀과 누에고치가 흰 빛이라는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나는 상주군 내서면 신촌리에서 태어나 내서초등학교와 상주농잠학교를 졸업한 뒤 도시를 떠돌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한때는 상주고등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친 적이 있다. 지금 상주에는 내 아우가 살고 있어서 부모님 묘사를 지내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상주군 내서면장으로 재직했지만 땅 한 평도 없는 청빈한 선비셨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은 산 밑에 있는 초가집에서 태어나 친구도 없이 우리 형제끼리 놀며 싸우며 지냈다. 어쩌다 내 아우를 등에 업고 일갓집에 놀러 갈 때가 있지만 길이 멀어서 자주 가지 못했다.
나는 아홉 살 때 내서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때는 일제강점기여서 학교에 가면 우리말 대신 일본말을 사용해야 했다. 해방이 된 후에야 비로소 나는 한글을 배워 우리말로 된 교과서를 겨우 읽게 되었다. 우리말은 일본말보다 쉬웠던지 아이들도 책을 읽을 줄 알게 되어 공부하는 것이 재미가 있었다.
우리는 그때부터 한글로 된 교과서로 수업을 하게 되었는데 한글은 배우기도 쉽고 쓰기도 쉬워서 며칠 만에 읽고 쓰는 것은 다 배우고 글짓기까지 하게 되었다. 또 담임 선생님이 글을 많이 읽으라고 하셔서 한글로 된 글을 열심히 읽기도 했다.
한번은 선생님이 제목을 칠판에 써놓고 그 제목에 맞는 글을 지어오라고 하여 생각나는 대로 밤늦게까지 글을 지어 선생님께 보여드렸더니, 선생님은 칭찬을 하시며 학생들 앞에서 읽어보라고 하고 박수를 받은 일도 있었다. 그 사건을 계기로 해서 열심히 글을 쓴 덕에 30세 되던 해에 서울에 있는 일간지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이 아닐까 하고 혼자 생각해 보곤 한다. 그만큼 특기나 특성은 어릴 때부터 싹이 튼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남보다 뛰어난 능력을 타고나는데 부모들은 자식들의 특기나 특성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알게 됐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상주농잠학교에 입학했더니 교실에서만 수업을 하지 않아 농사짓는 데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 6'25사변(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우리 군인들은 대비하지 못했다. 후퇴를 거듭해 내가 다녔던 내서초등학교에까지 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아이들은 방학 아닌 방학으로 학교에 가지 않고 놀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마을 사람들에게 남쪽으로 내려가라는 전갈이 왔다. 마을이 전쟁터가 된다고 하니 앉아서 죽을 수는 없어서 우리 식구도 옷가지와 양식을 머리에 이고 짐을 등에 지기도 하고 먹을 것을 손에 들고 피란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갈 데가 없어 할 수 없이 선산에 사는 누나네 집을 향하여 걸어서 낙동강을 건넜다.
그런데 그때 누나네도 피란 보따리를 싸들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피란민이 가는 길을 따라가다가 끼니때가 되면 밥을 해먹고 잠은 길옆이나 산 밑에서 잤다. 그래서 다다른 곳이 군위군 효령면이었다.
그때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북한 공산당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라며 길을 막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우리 식구는 되돌아서서 다시 낙동강을 건너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집안은 말이 아니었다. 누가 왔다 갔는지 살림살이는 사방에 흩어져 있고 먼지가 뽀얗게 쌓여 있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집에 북한 군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밤에 파괴된 도로를 복구할 예정이니 저녁 먹고 다리 밑으로 모이라고 했다. 괭이를 들고 나가 보니 사람들이 모여 돌을 나르고 있었다. 나도 그들이 시키는 대로 밤늦도록 일을 했다. 그러던 중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북한군은 후퇴하기 시작하더니 어디로 도망쳤는지 언젠가부터 보이지 않았다.
지금 나는 대구에 살고 있다. 고향이 어떻게 변했는지 속속들이 잘은 모른다. 이따금 고향에 가볼 때마다 낯선 건물, 낯선 다리, 낯선 도로에 놀랄 뿐이다.
부모님 유골은 경모당에 모셨다고 한다. 경모당은 진양 정씨 조상들의 유골을 모시기 위해 마련하였다고 하며 성묘 대신 가을에 같이 모여 경배를 올린다. 고향을 지키고 있는 아우가 모든 일을 대신해 주니 고맙지만 형으로서 할 일을 다 못하는 것 같아 부끄럽고 미안하다.
정지용의 시에 고향에 찾아가도 그리워하던 고향이 아니라는 그런 뜻이 담긴 시가 있는데, 내가 그런 것 같다. 옛날 내가 살던 고향은 보이지 않고 세상이 바뀌어 새로워진 고향이 되어버렸다.
옛날에는 해마다 놓던 돌다리가 지금은 시멘트 다리로 변하였고 옛날에는 초가집만 있던 마을이 온갖 모양의 건축물이 들어서서 낯설기만 하다. 그리고 내가 다니던 내서초등학교는 이름조차 없어지고 그 터에는 낯선 건물이 서 있다. 내가 다니던 상주농잠학교가 지금은 대학이 되었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고향 선산에 가서 묻히겠다고 하지만 나는 20년 전 대구 동산병원에 찾아가서 내가 죽으면 장기 일체와 신체 전부를 기증하겠다는 서약서를 유가족의 도장을 찍어 제출해 놓았다. 그러니 죽어서도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다.
내 아내는 몇 년 전에 이 세상을 떠났다. 화장을 했고 유골은 납골당에 모셔놓았다.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나는 제사도 지내지 말라고 유언을 남겨 두었다. 아들은 없고 딸만 넷이어서 제사 지낼 사람도 없는 것도 이유지만 그보다는 죽어서 자손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솔직한 내 심정이다.
자손들에게 강요는 하지 않지만 내 재산 중 일부를 떼어 불우한 학생들을 위한 장학금을 마련해주기를 내 딸들에게 미리 부탁해 놓을까 한다.
내 고향 상주는 나를 길러준 어머니와 같은 곳이다. 누가 상주에 대한 이야기를 하거나 고향 사투리 섞인 말을 하면 초면이지만 친구나 이웃사람 같은 정감을 느낄 때가 많다.
나는 형제가 많지만 그중에서도 나의 큰형님(재원'在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큰형님은 상주농잠학교 졸업 학력밖에 없지만 고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경상북도 농촌진흥원장으로 재직할 당시 농지정리를 시행해 농업기계화를 앞당기는 데 기여했다. 경상남도 작물농장장으로 재직하다가 위암이 악화되어 세상을 떠났지만 농림부 산하 공무원들이 성금을 모아 모범공무원 추모비를 칠곡 농촌진흥원 옆에 세웠고 그 비문을 시인 김춘수님이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고향은 평생 내가 그리워한 나의 연인이다. 이 세상 모든 연인들이 언젠가는 늙고 병들어 죽게 되지만 고향은 영영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늘 그 모습으로 내 기억의 연인으로 남아 있다.
정재호 시인·수필가
댓글 많은 뉴스
구미 '탄반 집회' 뜨거운 열기…전한길 "민주당, 삼족 멸할 범죄 저질러"
尹 대통령 탄핵재판 핵심축 무너져…탄핵 각하 주장 설득력 얻어
계명대에서도 울려펴진 '탄핵 반대' 목소리…"국가 존립 위기 맞았다"
尹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임박…여의도 가득 메운 '탄핵 반대' 목소리
이낙연 "'줄탄핵·줄기각' 이재명 책임…민주당 사과없이 뭉개는 것 문화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