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의창] 제발, 물어 줘

'진정한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국민타자로 일컬어지는 어느 야구선수의 좌우명이란다. 노력에게 결코 배신 당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축복받아 마땅한 행운아다. '배신당한 노력에는 분명히 문제가 있다!'

승패만으로 모든 노력의 진정성을 따진다는 건, 때로는 가혹한 폭력일 수도 있다. 이기고 졌다는 것이 곧 그 동안의 노력에 담긴 진정성과 열정의 있고 없음으로 기억되고 기록으로 남아, 패배자란 그저 진 사람이 아니라 곧장 어딘가 모자라고 무언가가 빠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어버리곤 한다. 패배자의 뒷모습은 그래서 고달프고 또 애달프다.

'슈퍼스타 감사용'(2004)은 줄곧 비틀거렸지만, 끝내 거꾸러지지 않은 어느 패배자의 빛나는 이야기다. 애초부터 안팎으로 추락이 예고된 길이었다. '슈퍼'는 고사하고, 희미하게나마 빛나는 '스타' 한 명 없이 날림공사로 급조된 '삼미 슈퍼스타즈'라는, 1982년 80경기 15승 65패 0.188이라는 역대 최저승률을 기록한 도깨비도 되지 못한 허깨비 야구팀. 통산 5시즌을 버티면서 61게임에 나서 1승1세이브를 거두는 동안 15패, 승률 0.063이라는 기록적인 전적을 남긴 불굴의 투수이자, 상대 팀으로부터 그저 '감사해용'이라는 굴욕적인 칭송을 받던 야구선수. 그 치명적이도록 궁상맞은 동행이 빚어내는 한바탕의 눈물겨운 이야기다.

자꾸만 끌리고 무작정 행복했던 소싯적의 추억과 한 시절 동네야구를 주름잡던 짜릿한 기억에 힘입어, 멀쩡한 직장까지 걷어치우고서 뛰어든 야구판. 그 시작은 달콤하였으나, 뒷맛은 두고두고 차갑고도 쓰라렸다. 냉엄한 현실을 딛고서 뜨거웠던 꿈의 날갯짓을 펼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가, 이리저리 떠밀리다가 마침내 찾아온다.

지금껏 단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최강팀의 에이스, 그것도 한창 독보적인 연승 기록을 이어가고 있는 박철순이라는 투수와의 한판 승부다. 누구에게도 뻔히 예상되는, 어느 누구도 기대를 걸지 않는 승부에 모든 것을 걸었다. 진정 슈퍼스타로서 한껏 타오르다가,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찬란하게 깨어진다.

애당초 무모하였고, 허우적거릴수록 자꾸만 수렁으로 빠져드는 길. 지나온 길은 이미 아득하고 나아갈 길은 도대체 보일 기미조차 없는데, 어떻게 헤쳐 나왔을까? 누군가 있었다. 눈앞이 흐려오고 무릎이 지레 꺾일 때면, 내 곁의 누군가가 귀 기울여주고 손 내밀어 주었다. 빤한 빈말일지라도, 그들이 들려주는 위로와 격려는 무척이나 힘이 세었다. 자살이든 살인이든 '묻지 마'라는 벼랑 끝에 선 숱한 이들이 되삼켰던 신음 소리가 비로소 들려온다. '묻지 마'라는 단말마의 비명이 실은 '제발, 물어 줘'라는 절절한 애원이었음을. 단지 우리들이 지레 눈 감고 귀 막고, 그리고 입 닫고 있었을 뿐이지.

송광익 늘푸른소아청소년과의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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