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매일춘추] '잘못했습니다'

멋모르고 약국에 들어서는데 전산직 아가씨가 큰 소리로 떠든다. "약사님 때문에 사흘치가 다 날아갔어요."

젊은 사람들끼리 하는 얘기겠지 싶어 그저 하던 대로 가운만 갈아입고 있었다. 전날이 정초라서 아무도 하기 싫은 일을 내가 맡아서 근무하고 난 터이다. '수고했다'는 말을 은근히 기대했다. '고맙다'는 인사는커녕 의외의 말이 나를 겨냥한 것을 알았을 때, 한참 동안 엉거주춤했다. 연휴에 백업(back up)을 안 하고 둔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고, 그것이 모두 '내 탓'이 되어버렸다. 그저 지나가는 말로 한 소리였겠지만, 나의 가장 아픈 곳을 건드렸다. 컴퓨터나 팩스 등에 문제가 생기면 동료들 누구나 말은 하지 않았지만, 으레 고령자인 나를 의심하는 것을 안다. 예상을 넘어서는 나의 격한 반응에 약국은 어색하게 조용해지고 말았다.

우리 집엔 팔순이 넘은 노모가 있다. 문명의 이기를 받아들이는 데는 나보다 훨씬 적극적이어서 하루에 서너 번씩 컴퓨터 앞에 앉아 시간을 보내신다. 물론 인터넷 검색이나 메일, 프리셀이나 고스톱 같은 간단한 게임을 즐기는 정도지만, 어떤 때는 바탕화면도 바꿔놓고 메뉴를 일렬로 정리해 놓기도 하신다. 좋게 봐 드리고 싶을 때도 있지만 '알면 뭘 아신다고 저러시나'라면서 속으로 무시할 때가 많았다. 바로 며칠 전 우리 집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을 때였다. 노모는 한사코 본인 잘못이 아니라고 우기셨다.

"엄마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엄마는 몇 번이나 '그냥 게임만 즐겼을 뿐'이라고 했다. 엄마의 말을 믿어드리기는커녕 무조건 단정 지으면서 화를 냈던 것이 생각난다. 소리 지르는 딸의 서슬에 눌려 엄마는 그만 입을 다무셨다. 그리고 조용히 본인의 방에 들어가 펴놓은 자리에 누우셨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인생의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차디찬 회오리바람은 무방비로 서 있는 노인들의 가슴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북극 추위보다 더 춥고 무서운 건 인간의 편견'이라고 어느 작가는 말했다. 노인에 대한 냉대(冷待)는 예의 속에서만 안주하려는 젊은 사람들의 무관심으로 형성된다. 노인들은 그저 추위를 모르는 척 자꾸 외면한다. 바람이 쌩쌩 불어와도 방어하는 방법을 몰라 남은 가슴마저 내어준다. 그래서 노인의 겨울은 북극의 혹한보다 더 춥고 길다.

그때는 몰랐다. 단지 나보다 늙었다는 이유로 엄마의 말을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무시해 버렸다. 그리고 바로 며칠 후에, 단지 그들보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도 젊은 사람들한테 똑같이 무시를 당하고 있다. 사람들은 똑같은 자리, 같은 경우에 처해 봐야 비로소 아픔과 잘못을 느끼게 되는 어리석은 동물인 것을 어찌하랴? 이제라도 늦지 않았다면 꼭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엄마, 제가 잘못했습니다."

고윤자 약사'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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