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통합민주당 대선 후보는 6'25전쟁 중 경남 거제도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이다. 어머니가 연탄을 배달해야 끼니를 때울 수 있을 정도로 가난했고 초등학교 입학 한 해 전인 1958년 가족과 함께 부산 영도로 이사했다.
문 후보는 부산의 명문으로 통했던 경남중을 졸업했고 경남고엔 전체 수석으로 입학했다. 공부는 잘했지만 바른생활 사나이는 아니었다고 한다. 스스로 '문제아'였다고 회고하고 있다. 술도 했고 담배도 피웠으며 싸움을 해 정학을 당한 적도 있다. '사상계' 같은 사회비평 잡지를 손에 든 시기다.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 법대에 입학했다.
하지만 대학 입학과 함께 유신 체제가 시작되자 운동권 학생의 길을 걸었다. 대학 3학년 때에는 총학생회 총무부장을 맡기도 했다. 당시 총학생회장은 강삼재 전 신한국당 사무총장이었다. 반유신 시위가 최고조에 이르렀던 1975년 문 후보는 유신반대 시위를 주도하다 구속당하고 제적당했다.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집행유예로 석방된 뒤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강제징집을 받아 특전사로 배치됐다. 특전사령부 제1공수특전여단이었는데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소속 여단장은 전두환 준장, 소속 대대장은 장세동 중령이었다. 1978년 제대하자마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 뒤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사시 준비 이유로 그는 "아버지에게 잘된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이고 싶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사시 1차에 합격하고도 다시 시위를 하다 구속되기도 했다. '부마항쟁'과 '서울의 봄'을 겪으며 정국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그가 사시 최종 합격 소식을 들은 것도 청량리경찰서 유치장에서였다. 합격 직후 당시 안기부(현 국정원) 직원이 문 후보를 찾아와 "데모할 때와 생각이 같은가"라고 물었는데 그가 "그때 나의 행동이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답한 것은 지금도 세간에 오르내리고 있다. 합격 취소를 각오했지만 아니었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했지만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로 임용되지 못했다. 그 길로 부산으로 가 인권변호사를 하게 됐는데 사시 동기인 박정규가 변호사이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개했다. 이때 노 전 대통령과의 만남을 그는 '운명'이라고 회고하고 있다. 둘은 '변호사 노무현 문재인 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렸고 1987년 6월항쟁 때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상임집행위원장에 노무현을 앉히고 문 후보는 상임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두 사람은 부산의 대표적인 재야인권변호사로 살았다.
1997년 민주화 이후 두 사람에게 정계 입문 권유가 있었는데 노 전 대통령은 1988년 정계에 진출했고 문 후보는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계속했다. 문 후보는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산지부장과 경남지부장을 역임하면서 시국사건 변론을 맡았다.
2002년 대선에서 문 후보는 노무현의 부산 선대본부장을 맡아 당선에 기여했다. 그 뒤 노 전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문 후보는 청와대로 들어가 민정수석, 시민사회수석, 비서실장 등을 역임했다. 노 전 대통령 탄핵 때는 네팔 여행 도중 귀국해 탄핵 변호인을 맡았다. 민정수석 시절 과로에 시달리다 치아가 10개나 빠졌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서상현기자 subo801@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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