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계산동에서] 탐욕은 탐욕을 부른다

'도덕적 해이'를 뜻하는 '모럴 해저드'(moral hazard)는 원래는 보험 용어였다. 화재보험에 가입한 보험 가입자가 화재예방 의무를 게을리하는 바람에 보험회사가 보험료를 지불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등장했다. 만일 보험회사가 모든 보험 가입자의 화재예방 노력을 파악할 수 있다면 화재예방 노력에 따라 보험료를 다르게 적용하거나 보험 가입 자체를 거부할 수 있겠지만 이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처럼 어느 한쪽이 상대방을 충분히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을 '정보의 비대칭'이라고 한다. 경제학에서는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면 모럴 해저드가 나타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정보의 비대칭이 존재하면 주인(보험회사)이 대리인(보험 가입자)의 행동을 완전히 관찰할 수 없어 대리인의 도덕적 해이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는 것.

최근 금융권의 도덕 불감증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올 들어 8월 말까지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징계를 받은 금융회사 임직원은 447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22명에 비해 두 배 정도 늘었다. 금융권 비리는 1'2금융권을 가리지 않고 전방위적으로 발생하고 있으며 비리 유형도 금융범죄 백화점을 보는 것처럼 횡령'사기 등으로 다양하다. 내부 감사 시스템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문제의 심각성을 더해준다. 지점장이 거액의 사기 사건을 벌인 한 시중은행의 경우 내부 감사를 벌이고도 적발을 하지 못해 내부 정화 기능에 심각한 허점을 드러냈다.

금융권의 비리가 만연하는 이유는 정보의 비대칭과 관련이 깊다. 금융권에 피 같은 돈을 맡긴 고객은 금융회사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정보만을 갖고 있다. 고객은 자신이 맡긴 돈이 안전하게 있는지를 알 길이 없다. 반면 금융회사는 고객의 신용 정보까지 손바닥 보듯 훤히 꿰고 있다. 감독권을 가진 금융감독원도 마찬가지다. 마치 보험회사가 보험 가입자를 모두 감시할 수 없는 것처럼 금융감독원도 금융회사의 모든 동태를 파악할 수 없다. 원천적으로 비리가 발생할 가능성이 상존하는 셈이다.

금융비리가 잇따라 터지자 최근 금융감독원은 9년 만에 금융비리 통계를 공개하고 비리에 연루된 임직원에 대한 형사 처벌 수위를 높이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의 대책은 엄포용은 될 수 있겠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사후 처벌로는 금융 정보의 비대칭을 해결하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현실적으로 '정보의 비대칭'을 견제할 장치는 없을까? 아쉽게도 금융회사 임직원들의 도덕 지수를 높이는 것 외에는 뾰족한 대안이 없어 보인다.

최근 한 금융회사 임원은 기자에게 금융맨들의 월급이 다른 업종에 비해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돈을 취급하는 직업이다 보니 기본적인 욕구가 충족되지 않으면 마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꼴이 된다"고 했다. 지금 금융권의 복지는 기본적인 욕구 충족 수준을 넘어 국내 최고 수준이다.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귀족 노동자로 분류되고 있을 정도다. 탐욕은 만족을 멀리하고 또 다른 탐욕을 부른다. 그러면 배부른 고양이가 생선을 탐하는 사태가 계속 발생할 수밖에 없다. 유대인의 필독서 탈무드에는 '돈은 착한 사람에겐 선한 일을 시키고, 악한 사람에겐 나쁜 일을 시킨다'는 구절이 있다. 도덕 지수를 높이는 것이 돈의 노예가 아니라 돈의 주인이 되는 길임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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