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여 년 전에도 성폭행이 사회적 문제였다, 때는 조선 중기 명종(1545~ 1567) 무렵. 밀양마을에 윤 사또의 무남독녀로 정옥(貞玉'이하 아랑)이라는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다. 평소 아랑에게 흑심을 품었던 이 고을 관노인 주기가 유모를 매수했다. 휘영청 달 밝은 날. 유모는 달 구경을 가자며 아랑을 영남루로 데리고 나와서는 소피를 보러 간다며 사라졌다. '이때다' 싶어 주기는 아랑을 성폭행하려 했다. 거부하던 아랑은 주기의 칼에 찔려 죽고 영남루 아래 대밭에 던져졌다. 졸지에 딸을 잃은 윤 사또는 딸의 종적이 묘연해지자 사직하고 밀양을 떠나고 말았다.
이후 새로 부임한 사또는 부임 다음날만 되면 비명횡사했다. '밀양 사또는 부임 첫날에 죽는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그때 담 큰 한 젊은이가 이 소식을 듣고 '죽을 때 죽더라도 사또나 한번 해보고 죽자' 싶어 자청을 했다. 부임하던 날 밤. 산발에다 피투성이인 아랑이 나타났다. "사또, 소녀의 억울함을 풀어 주소서." "너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누구냐." "내일 아침 점호를 할 때 흰나비가 되어 범인의 상투 위에 앉겠소."
사또와 아랑 사이에 이 같은 대화가 오고 갔고 다음날 아침 흰나비가 앉은 관노를 끌어내 곤장을 치자 마침내 실토를 했다. 영남루 아래 대밭을 파헤쳐 보니 원한에 사무친 아랑의 시체는 썩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다. 아랑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내고 그 자리에 아랑각을 지어 원혼을 달래주자 그 후부터 마을은 평화로웠다.
밀양을 대표하는 아랑 전설이 최근 TV 드라마('아랑사또전')로 방영되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아름다운 영남루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슬픈 이야기인 '아랑의 전설'을 따라 밀양으로 향했다.
◆영남루
TV에 나오는 모습이 컴퓨터 그래픽인 줄 알았다.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보물 제147호인 이곳은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3대 누각 중 하나로 꼽힌다. 고려 공민왕 때 밀양 군수에 의해 처음 지어졌고 현재 건물은 조선 헌종 때 다시 지은 것이라 한다. 낙동강의 지류인 밀양강변 절벽에 위치해 경관이 수려하다. 이곳에 누각을 지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곳 풍광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는 충분히 증명이 되는 셈. 영남루를 휘감아 돌아 광활하게 펼쳐지며 밀양강을 끌어안은 풍광은 아름다움 그 자체다. 영남루에 앉아 밀양강변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을 맞으며 마당에 만발한 꽃들을 눈에 담으니 세상 시름이 사라진다.
내다보이는 경관뿐 아니라 내부도 아름답다. 기둥과 기둥 사이를 연결한 보는 물론 대형 대들보가 모두 화려한 용신으로 조각되어 있다. 건물 내부를 장식하고 있는 당대 명필가와 대문장가의 시문'현판들이 즐비하다. '강성여화'(강과 밀양읍성이 한데 어울려 마치 그림과 같다), '용금루'(높은 절벽에 우뚝 솟아 있는 아름다운 누각) 등 운치가 있다. 일반인들에게 사시사철 개방되어 있다. 입장료도 없다. 가벼운 마음으로 왔다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어서 더 좋다.
◆아랑각
영남루에서 오른쪽으로 난 길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가면 대밭이 나타난다. '피 묻은 대나무밭' 아랑의 전설이 깃든 곳이라 살짝 으스스해진다. 강변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계단을 타고 올라오면 아랑의 영정을 모셔놓은 아랑각이 있다. 요즘 아랑사또전의 인기 때문인지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었다. 영정 속 아랑 아씨의 미모가 아랑 사또전의 여주인공 역을 맡은 신민아의 미모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이 영정은 1963년 고 육영수 여사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솜씨를 빌려 제작한 것이다. 사당의 양쪽 벽에는 아랑 전설에 관한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림 속에 영남루가 있어 아랑의 전설이 영남루에 이야기를 하나 더해 주고 있는 셈이다. 아랑각 앞에는 거대한 느티나무가 오랜 세월 아랑을 지키고 있다. 매년 밀양아리랑대축제 행사를 통해 선발된 모범규수들이 제관이 되어 음력 4월 16일 제를 올리고 있다.
참, 이곳에 연인끼리 손을 잡고 오거나 애정행각을 벌이면 그 연인은 깨어진다는 소문이 전한다. 아랑은 한 번도 사랑을 못 해본 처녀이기에 다정한 연인들을 시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자유겠지만 혼령을 기리는 아랑각에서 경거망동은 삼가는 것이 좋을 듯하다.
◆작곡가 박시춘 옛집
영남루 왼쪽 언덕에 초가집이 외롭게 서 있다. 작곡가 박시춘 선생이 어릴 때 살았던 곳이다. 박시춘(朴是春'1913~1996)은 일본 유학시절 트럼펫'바이올린'색소폰'기타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하면서 작곡가로 데뷔를 했다. 1931년 남인수가 부른 '애수의 소야곡'을 비롯해 '이별의 부산정거장' '굳세어라 금순아' '전선야곡' '신라의 달밤' '비 내리는 고모령' 등 많은 곡을 남겼다. 3천여 곡의 노래와 악상을 남겨 '한국 가요의 뿌리이자 기둥'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이곳 입구에는 박시춘 선생의 흉상과 '애수의 소야곡' 노래비가 있다. 예전에는 이 노래비 앞에서 선생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들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선생이 친일 논쟁에 휩싸이면서 노래를 중단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비극이다.
[Tip] 윤 사또의 딸이 아랑(阿娘)이라 불리게 된 것은 우리나라뿐 아니라 중국에서도 이처럼 원한 맺힌 귀신 이야기, 즉 원령설화(怨靈說話)가 전해지고 있는데 설화연구가인 손진태 씨가 그의 저서 '조선민족설화의 연구'(1947년)에서 이러한 계열의 설화를 '아랑형전설'이라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대구에서 밀양 영남루로 가는 방법은 쉽다. 열차편으로 가도 좋고 자가용을 이용해도 편하다. 경부선 열차는 대부분 밀양에서 정차한다. 밀양역에 내려서 걸어서도 갈 수 있다. 수성IC나 북대구IC에서 부산 방면으로 가다 밀양IC에서 내리면 된다. 삼문동 쪽으로 방향을 잡아 10분 정도 가다 보면 밀양교가 보이고 영남루가 모습을 드러낸다.
글'사진 최창희기자 cchee@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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