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의료 사각지대

시골에 사는 70대 노인이 갑자기 어지럽다며 풀썩 주저앉았다. 구토 증세까지 보였다. 그나마 할머니가 곧바로 발견해서 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후에 벌어졌다. 의식불명은 아니어서 의사 표현은 가능한데 혼자 걸음을 떼지 못했다. 칠순 노인 둘이 쓰러지고 자빠지기를 반복하다가 가까스로 마을 어귀까지 걸어나왔다. 옷은 흙투성이가 됐고 두 노인네 모두 무릎이 다 까졌다. 무릎 관절염을 앓고 있던 할머니가 어떻게 그런 힘이 났는지 불가사의할 지경이었다. 20여 가구 사는 마을에 온통 노인들뿐이니 자동차가 있을 리도 만무했다.

우여곡절 끝에 할아버지는 한 시간 남짓 걸리는 도회지로 나와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때마침 지나가던 아랫마을 청년이 아니었으면 이마저 장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자세한 병명과 치료 경과는 생략하자. 아무튼 1차 치료는 끝이 났고 할아버지는 한쪽 귀가 들리지 않게 됐다.

문제는 또 있었다. 혹시 모르니 큰 병원에 가보라는 말을 듣고 할아버지는 대도시 대학병원에 가보기로 했다. 진료 확인서가 필요했고, CT와 MRI 검사 영상을 담은 CD가 필요했다. 한창 손길이 많이 가는 농사일도 제쳐 둔 채 할아버지는 아침 나절부터 동네 어귀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하루는 진료 확인서를 떼러 갔고, 사흘 뒤 CD가 없으면 다시 검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다시 버스를 기다렸다. 자식이 넷이나 있지만 모두 멀리 떨어져 산다. 도회지 병원에 갈 때 딸이 차를 몰고 와서 할아버지를 모셨고, 대학병원에 가는 날 아들이 오기로 했다. 하지만 치료가 길어지면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기초생활수급 대상자인 A(62) 씨는 오늘도 병원에 간다. 근골격계질환(이른바 골병), 위장 질환, 피부병 등으로 하루도 빠짐없이 병원에 간다. 한 곳만 가는 게 아니다. 6개월간 350여 일치 약을 탔고, 진료일수는 2천600여 일을 헤아린다. 하루 평균 병의원 15곳을 다닌 셈이다. B(55) 씨는 위출혈 등으로 6개월간 4천여만 원을 썼고, C(59) 씨는 간질환 등으로 진료비 1천200여만 원을 썼다. 똑같은 약을 중복 투여한 날은 433일에 이른다.

이들은 모두 의료급여 대상자다. 생활 형편이 어렵다 보니 국가가 치료비 전액 또는 일부를 지원해 주는 제도다. 이들의 하루 일과는 병원에서 시작해서 병원에서 끝난다. 물론 모든 의료급여 대상자가 이렇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데 유난스레 병원을 자주 찾는 사람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우울증을 앓고 있다는 점이다. 외롭고 쓸쓸해서 하루해가 모자랄 정도로 병원에 간다는 말이다. 뼈마디가 쑤시고 위장이 아픈 탓도 있지만 말 한 마디 건네고 눈길 한 번 마주칠 사람이 그리워서 병원에 간다.

대구에서만 이들의 진료비로 지난해 3천200억여 원이 쓰였다. 국비로 80%를 지원해 주지만 대구시 부담은 여전히 크다. 내년 1월이면 700억 원이 부족할 전망이다.

첨단의료도 좋고 의료관광도 좋다.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큼 공적 부조 성격이 강한 건강보험도 좋다. 하지만 이건 아니지 않은가. 대도시 대학병원은커녕 읍내 의원 한 번 가는 것도 쉽잖은 농촌의 노인들만 의료 사각지대에 있는 것은 아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병의원에 죽치고 앉아 다 먹지도 못할 만큼의 약을 타는 도시 빈민들도 마찬가지다. 한 번에 먹을 약이 한 움쿰도 넘지만 몸이 낫는 것은 아니다. 정작 아픈 곳은 바로 마음이다. 우리는 그저 외면하고 못 본 척할 뿐이다.

참여정부 시절 지역거점병원을 시'군마다 확충하고, 인구 5만 명당 도시형 보건지소를 건립하겠다고 했다. MB정부도 효율적인 국민건강안정망 개혁을 외쳤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의료 서비스와 인적'물적 자원의 도심 집중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다.

골고루 나눠 주는 것이 균형 발전은 아니다. 모자란 곳을 채워주고, 남는 곳에선 덜어와야 한다. 도시와 농촌에 걸맞은 보건의료 정책을 펴야 한다. 시'군'구 담당자들은 그저 예산이 내려오면 나눠 주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우리 동네에 사정이 이러저러하니 그에 맞는 예산을 달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정부 정책 탓만 해선 나아질 수 없다. 누구는 병원 문턱조차 넘기 힘든데 누구는 병원 문턱이 닳도록 자주 간다. 바꿀 수 있고 반드시 바꿔야 할 심각한 문제인데도 지금껏 바뀌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김수용 기획취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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