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선물은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을 여실히 반영한다. 올해 추석에는 1만원도 안 하는 선물세트 등 저가형 선물이 인기를 얻고 있다. 그만큼 서민들의 삶 속에 '불황'의 그늘이 깔려 있다는 얘기다.
◆추석 선물 고르는 현장 가봤더니
이달 17일 오후 대구의 한 대형마트 지하 1층. 중앙에는 추석 선물용 제품이 잔뜩 쌓여 있었다. 추석 선물의 대명사인 치약'비누'샴푸 등이 들어 있는 생활용품세트와 햄'참치 통조림 및 식용유가 들어 있는 가공식품세트는 물론 홍삼'흑마늘 등 건강식품세트와 양주'전통주 등 주류세트 등 종류가 다양했다.
손님들 중 동료 직원들에게 지급할 추석 선물을 대량으로 구입하기 위해 찾은 한 회사 총무팀 직원들이 눈에 띄었다. 이들은 마트 직원을 상대로 생활용품세트에서 비누 하나, 치약 하나가 빠지거나 포함되면 가격을 얼마나 저렴하게 맞출 수 있는지 꼼꼼하게 따졌다. 이들은 "빠듯한 예산으로 직원들이 흡족해할 만한 선물세트를 고르기 위해 꼼꼼하게 둘러보고 있다. 단가는 1만~2만원 안팎에서 선택할 계획이다"고 말했다. 마침 이들과 같은 대량 구매 손님을 위해 마트에서는 몇 개를 사면 한 개를 더 주는 '플러스 원' 마케팅을 하고 있었다.
주부 조모(44) 씨는 추석 선물용 제품을 돌아보다 멈칫멈칫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1만원도 안 하는 선물세트가 진열대 곳곳에 숨어 있었던 것. 2천900원 하는 양말세트부터 4천원 하는 비누세트, 7천290원 하는 전통주세트, 8천640원 하는 커피믹스세트, 9천200원 하는 흑마늘세트, 9천900원 하는 유기농간장세트 등이 조 씨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수만원대의 고급 건강식품인 홍삼세트 사이에는 9천400원 하는 홍삼캔디 제품이 눈에 띄었다.
조 씨는 "1만원도 안 하는 선물세트지만 수만원대의 선물세트처럼 포장이 고급스럽다. 다만 내용물이 적게 들었고, 규격이 작을 뿐이다"며 "가까운 친척이나 지인들에게는 값이 나가는 추석 선물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외의 지인들에게는 1만원 정도의 선물세트가 적당할 것 같다. 가격이 저렴하니 받는 사람도 부담이 적어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통시장은 따로 규격화된 선물세트를 판매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골라 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저렴한 선물세트를 만들 수 있다. 전통시장의 또 다른 장점은 다양한 제품을 요리조리 따져 흥정도 하며 고를 수 있다는 것.
◆불황형 선물이 대세, 양극화 양상도
살펴봤더니 이번 추석 선물 구입 트렌드는 '불황형 소비' 추세가 만든 것이다. 고가의 사치품보다는 저가의 실속형 먹을거리나 생활용품을 선물로 구입하는 것이다.
이를 예상한 대형마트와 백화점 등 유통업계는 추석을 앞두고 1만원 이하 선물세트 등 초저가 제품을 대거 내놓았다. 이마트는 이번 추석 선물세트 구매 고객의 20%가량이 1만원 이하 제품을 구입할 것으로 보고 저가 제품의 품목과 물량을 사상 최대 규모로 늘렸다. 1만원 이하 생활용품 세트 80만 개가량과 가공식품 세트 10만 개가량을 준비한 것. 홈플러스는 1만원짜리 사과'배 선물세트를 선보였다. 롯데백화점도 9천900원 하는 와인세트를 선보이는 등 초저가 제품 판매에 동참했다.
그러면서 최근까지 추석 선물세트 예약 판매 실적은 크게 증가했다. 업계에 따르면 백화점들의 경우 지난해 추석에 비해 10~90%까지 매출이 늘었고, 각 대형마트도 지난해 추석에 비해 200%가 넘는 매출 신장률을 보이고 있다.
반면 저가 제품의 비중이 높아지면서 추석 선물세트의 평균 단가는 하락했다. 롯데백화점의 예약판매 기간 중 판매 1건당 단가는 지난해 추석보다 20% 낮아졌다. 이마트의 경우 2만~3만원 하는 저가 제품을 구입한 고객이 39%로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지난해 추석에는 3만~5만원 하는 중저가 제품을 구입한 고객이 46%로 제일 많았던 것과 비교된다.
저가 제품도 많지만 소수 VIP 고객을 놓치지 않으려 내놓은 고가의 제품도 적잖은 등 추석 선물은 양극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초저가' 대 '프리미엄' 제품의 구도인 것. 한 백화점 관계자는 "올해 추석에는 저가 선물세트를 찾는 고객과 10만원 이상의 고가 선물세트를 구입하는 고객으로 양분될 것"이라고 말했다.
롯데백화점은 세계 3대 진미로 불리는 캐비어'푸아그라'송로버섯과 스페인식 소시지인 하몽으로 구성한 '세계진미세트'를 63만원에 판매하고 있다. 제주 흙소'울릉 칡소'황우 등 프리미엄 한우 3종을 모은 한우세트는 65만원이다.
최근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재미난 설문조사를 했다. 20대에서 40대까지 남녀 직장인 500명을 대상을 '가장 반갑지 않은 추석 선물'을 물은 것. 1위는 양말'스타킹'손수건 등이 담긴 잡화세트(41.8%)였고, 2위는 비누'치약'샴푸 등 생활용품 세트(26.6%)였다. 많은 소비자가 이번 추석에 저가형 선물세트를 준비하고 있지만 정작 받기는 싫다는 얘기다.
◆명절 선물의 변천사
명절 선물은 시대 변화를 그대로 반영하며 변천사를 겪었다. 지난 세기 산업화시기를 거치며 살만해지면서 생필품에서 기호품으로 품목이 달라졌다. 1990년대 중반 상품권이 등장하며 일대 변화를 겪기도 했다. 그러다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이후 저렴한 생필품이 다시 인기를 얻었고, 올 추석에는 저가형 제품이 인기를 얻음과 함께 양극화 양상을 보이는 등 서민들의 주머니 사정을 여실히 보여주는 지표가 되고 있다.
1950년대에는 달걀'찹쌀'돼지고기'토종닭 등이 주요 명절 선물이었다. 백화점은 대도시에나 있었던 시절, 대중교통도 원활하지 못했던 시골에서는 가까운 친척과 이웃끼리 푸근한 선물을 주고받았다.
여전히 배고팠던 1960년대에는 명절 선물로 가공식품이 인기였다. 6㎏짜리 '그래-뉴설탕'(680원)과 50개들이 라면 한 상자(500원)가 인기를 끌었다.
1970년대 한 백화점 카탈로그에는 1천여 종 명절 선물 세트가 실렸다. 조금 살만해졌다는 얘기다. 24병들이 콜라 한 상자(1천800원)'맥스웰 커피세트(680~1천290원) 등 배고픔보다는 입맛을 충족시켜주는 기호식품이 인기였다. 70년대 말 들어 명절 선물로 설탕과 세탁비누는 점차 사라졌고, 식용유'조미료'미용비누'화장품 등이 등장했다. 라디오와 흑백TV는 고가의 명절 선물이었다.
1980년대에는 넥타이'지갑'와이셔츠 등 신변잡화용품이 명절 선물로 보편화됐다. 식품으로는 정육과 과일 세트가 등장했다. 인삼'영지'꿀 같은 건강식품도 등장했다. 백화점 카탈로그에 실린 명절 선물 세트 가지 수도 3천여 종으로 늘었다.
1990년대에 백화점 명절 선물은 최고가를 계속 경신했다. 100만원대의 양주'굴비 등이 비싼 가격에도 불구하고 인기를 끌었다. 1994년 4월에는 백화점 등에서 상품권이 본격 판매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1998년 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사라졌던 설탕이 명절 선물로 등장했고, 사람들이 저가의 가공식품'생활용품 세트를 찾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저가 제품과 프리미엄 제품으로 명절 선물이 나뉘는 양극화 양상이 본격화됐다.
2000년대 들어서며 주류 품목에서는 부동의 위치에 있던 위스키를 밀어내고 와인이 1위 자리에 올랐다. 식품 품목 전반에 걸쳐 웰빙 트렌드가 대세로 자리 잡은 것도 특징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서민들은 가벼운 주머니 사정에 저렴한 생활용품'가공식품세트에 만족하는 상황이다. 업계에 따르면 올 추석 선물세트 시장 규모는 4조원 정도. 이 중 생활용품'가공식품세트가 70%를 차지한다. 나머지는 육류나 과일 같은 신선식품'건강식품'패션잡화'주류 상품이 차지하고 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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