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을 거닐 때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그 숲은 얼마나 쓸쓸할까요? 인간 세상에서 숲의 새소리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가수가 부르는 절절한 노래가 아닐까 합니다. 새소리가 있어서 숲이 더욱 아름다운 것처럼 가수들의 좋은 노래가 있어서 세상살이의 고달픔은 한결 반감되고 위로를 느끼게 되는지도 모릅니다.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강탈당하고 갖은 유린을 겪던 시절, 입이 있어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볼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하던 때에 이난영이 불렀던 노래 한 곡은 우리 강토를 깊은 슬픔과 격동 속에 잠기도록 했습니다.
대체 깊은 슬픔이란 무엇일까요? 다만 슬픔의 늪 속에 빠져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은 깊은 슬픔이 아닐 것입니다. 슬픔을 불러오게 한 근원을 찾아내어 그것을 파헤치고, 모순과 부조리에 대한 올바른 분별과 깨달음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힘을 깊은 슬픔은 가졌습니다. 식민지 시대 가요계에는 슬픔에 잠긴 우리 겨레의 가슴을 쓰다듬고 위로해주던 많은 가수들이 있었으나 이난영만큼 생기롭고도 발랄하며 상큼하면서도 깊은 슬픔을 느끼게 해주었던 가수는 그리 흔하지 않았습니다.
이난영으로 하여금 깊은 슬픔의 성음을 자아낼 수 있도록 해준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거의 모진 핍박에 가까운 고난과 역경이 바로 그 힘이었을 것입니다. 인생의 그 어떤 신산한 지경에 허덕일지라도 이난영은 결코 무릎을 꿇거나 비굴하지 않은 자세로 그 고난의 시간을 이겨내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지혜와 자세가 아닌가 합니다.
1916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이난영은 어릴 때 이름이 옥순입니다. 항상 병을 앓고 있는 아버지, 지독한 가난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떠난 이후로 줄곧 땅에 뿌리내리지 못하는 물풀처럼 살아갑니다. 삼촌 댁에서 더부살이 아이로, 혹은 제주도의 일본인 가정에 들어가서 아이보개로, 혹은 떠돌이 유랑극단의 식모살이와 무명의 막간가수로….
이것이 소녀 이옥순이 겪었던 눈물의 시간입니다. 1930년대 초반 이옥순은 태양극장의 이름 없는 막간가수로 일본 공연에 참가하게 됩니다. 이 무렵 태양극장 단장이던 박승희가 옥례의 예명을 이난영이라 지어주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의 활동도 고달픈 역경의 한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밥도 굶고 생활비도 떨어져 거의 죽음의 문턱까지 다다랐을 때 이난영은 마침내 오케레코드라는 멋진 활동무대와 만나게 됩니다. 이철 사장과의 운명적 만남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난영의 나이 17세 되던 1933년은 그녀의 새로운 인생이 펼쳐지던 화려한 무대의 시간이었습니다. '지나간 옛꿈'(김파영 작사'김기방 작곡, 태평 8068), '향수'(김능인 작사'염석정 작곡, 오케 1580)를 단번에 히트시키면서 잇따라 '고적' '불사조' 등을 발표했습니다. 전 조선의 가요팬들은 애교를 머금은 이난영의 독특한 코맹맹이 소리에 흠뻑 빠져들었습니다. 가슴속에 켜켜이 쌓여 전혀 녹을 기색조차 없던 슬픔과 한이 이난영의 노래를 듣는 순간 스르르 녹아내려 눈시울을 흥건히 적시곤 했던 것입니다. 이난영의 두 번째 히트곡으로는 '봄맞이'(윤석중 작사'문호월 작곡, 오케 1618)를 손꼽을 수 있습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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