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가야산 소리길

사람은 사람과 어울리고 소리는 소리와 어울려야

비 온 뒤 가야산 소리길의 물소리는 장엄하고 우렁차다. 장마의 시작을 알리는 빗줄기가 하루 종일 추적거리더니 드디어 계곡의 물소리를 한 옥타브 이상 올려놓았다. 내려긋는 지휘봉 끝에서 일어서는 음들의 도약이 오케스트라의 절정을 이루듯 누가 하늘의 깃발을 흔들었는지 계곡의 물소리는 함성을 지르며 아래로 아래로 쏟아지고 있다.

구름 낀 하늘은 어디로 가버렸는지 텅 비어 있다. 색안경이라도 껴야 비로소 푸른 하늘이 보인다. 원래 산은 솔바람소리, 새소리, 물소리를 함께 키운다. 세 개의 소리 중 어느 것 하나라도 빠지면 절름발이가 되고 만다. 한 번 생각해 보자. 물이 흐르지 않는 계곡에는 새들이 모여들지 않고 바람이 분다 한들 마른 계곡 위로 스쳐가는 바람은 건조하기 짝이 없다. 사람은 사람과 어울려야 하고 소리는 소리와 어울려야 한다. 서로 어울리는 것끼리 모여야 숲이 되고, 오케스트라가 되고, 세상이 된다.

가야산 소리길은 홍류동 계곡을 관통하는 명품 중의 명품 계곡이다. 오죽했으면 신라의 최치원 선생이 이곳 농산정 주변의 무릉도원에 들어와 계곡 맛을 보고선 '다시는 이곳에서 나가지 않을 거야'라고 했을까. 그래서 예부터 홍류동 계곡은 가을 단풍과 물소리가 한데 어우러져 '합천팔경' 중에서도 첫손에 꼽히는 곳이다.

홍류동 계곡의 물소리는 계곡 속에 박혀 있는 바위가 만들어 낸 작품이다. 육산의 골짜기로 흐르는 물은 땅속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암산의 물은 바위에 부딪히면서 튕기고, 튕겨 올라간 물줄기는 물보라로 변하여 떨어지면서 다시 물살에 몸을 섞는다. 때론 푸르렀다가 어떤 때는 옥색인 물 더미는 모든 걸 삼켜버릴 듯 위압적이고 그 카리스마는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하잘것없는 인간의 왜소함을 비웃는다.

가야산 소리길 주변의 계곡은 날이 가물 땐 흐르지 않고 침묵한다. 그러나 폭우가 쏟아져 물이 불어나면 옆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그야말로 소리측정기구의 침이 멈춰버려 농아가 아닌 멀쩡한 사람들까지 수화로 말하게 한다.

바위가 하는 일은 계곡물이란 긴 현을 맑은 소리가 나게 쥐어뜯는 손가락 역할만 하는 게 아니다. 바위는 거대한 자석으로 자기장을 발생하고 있다. 피곤한 육신을 바위 위에 누이면 피로가 풀리고 머리가 맑아진다. 그래서 예부터 기가 센 산으로 알려진 영암 월출산과 계룡산, 마니산 등은 박수와 무당들이 '기도발이 잘 받는다'며 찾아와 도사 되기를 소원하는 곳이다. 실제로 계곡 옆 암반 위에 지어진 집에서 밤새도록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자고 나면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최근 가야산국립공원은 홍류동 계곡 옆 오솔길을 새 단장하여 가야산 소리길이라 명명했다. 원래 이 홍류동 계곡은 빼어난 경관과 맑은 물로 문인묵객뿐 아니라 관광객들의 사랑을 받아 왔다. 그런데 그 홍류동 계곡이란 보석에 오솔길 테두리를 둘러 마감처리를 했으니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거기에다 휘이익! 하고 지나가는 솔바람소리와 새소리, 그리고 물소리가 앙상블을 이뤄 화음을 맞추니 최치원보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도 찬탄을 금하지 못한다.

"날마다 산을 보건마는/ 아무리 봐도 늘 부족하고/ 언제나 물소리 듣건마는/ 아무리 들어도 싫증 나지 않는다"는 고려 때 승려였던 충지(1226~1292)의 시가 생각난다. 그뿐 아니다. 한 번 일어나기 시작한 시상은 꼬리를 물고 달려든다. 마종기 시인의 '메아리'란 시도 멋지다. "물이 노래하는 거 들어봤니/ 긴 피리 소리 같기도 하고/ 첼로 소리인지 아코디언인지/ 멀리서 오는 밝고 얇은 소리에/ 새벽 안개가 천천히 일어나/ 잠 깨라고 수면에서 흔들거린다/ 아, 안개가 일어나 춤을 춘다."(하략)

이 소리길이 하필 가야산 홍류동 계곡에 펼쳐져 있는 게 너무 안타깝다. 어느 날 인왕산 골짜기에서 우레 같은 물소리를 듣고 있던 추사는 "이 소리 세상에 들려 저 속된 것들 야단쳤으면"이란 시를 남긴 적 있다. 이 계곡의 물소리가 국회의사당 주변을 한 바퀴 돌아 그렇게 흘러갔으면 어떨까 싶다.

이 길은 들머리에서 해인사까지 6.6㎞로 2시간 30분이면 충분하다. 옛 어른들이 정한 가야산 경치 19경 중 16경을 만날 수 있다. 출발하기만 하면 10분만 걸어도 본전은 건진다. 비 온 다음 날이 물소리 듣기에 가장 좋다. "친구야, 같이 갈래."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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