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大幹 숨을 고르다-황악] <39> 독재에 항거한 '참언론인' 몽향 최석채

자유당 부패·독재에 맞선 '直筆'…직지사 자락에 묻히다

황악산 직지문화공원 끝자락에는 IPI에서 세계언론자유영웅 50인으로 선정된 몽향 최석채 선생 기념비가 자리한다. 기념비가 조성된 공원에 가족 나들이객이 찾아 둘러보고 있다.
황악산 직지문화공원 끝자락에는 IPI에서 세계언론자유영웅 50인으로 선정된 몽향 최석채 선생 기념비가 자리한다. 기념비가 조성된 공원에 가족 나들이객이 찾아 둘러보고 있다.
사설 원문을 원형대로 새겨놓은 동판.
사설 원문을 원형대로 새겨놓은 동판.

'이즈음에 와서 중'고등학생들의 가두행렬이 매일의 다반사처럼 되어 있다.(중략) 특히 우리가 괴이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것이 학교 당사자들의 회의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관청의 지시에 의하여 갑자기 행해졌다는 것을 들을 때 고급 행정 관리들이 상부 교제를 위한 도구로 학생들을 이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아닌가? 입을 벌리면 학생들의 '질'을 개탄하고 학도들의 풍기를 운위하는 지도층이 도리어 학생들을 이용하고 마치 자기네 집안의 종 부려 먹듯이 공부 시간도 고려에 넣지 않은 것을 볼 때 상부의 무궤도한 탈선과 그 부당한 지시에 유유낙낙하게 순종하는 무기력한 학교 당국자에 대해 우리들 학부형 입장으로 분개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중략) 끝으로 학교 당국자가 인과적인 '상부 지시 순종'의 태도를 버리고 부당한 명령이 있을 때는 결속해서 도 당국이나 교육구청에 그 비를 건의할 수 있는 노력과 학도 애린의 성의를 보여 달라는 것을 부탁하고저 하는 것이다.'

-매일신문 사설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 중에서-

황악산 직지사 산문을 못미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르면 도자기박물관, 백수문학관 등이 눈에 들어온다. 이들 건물 사이에는 '세계 언론 영웅 몽향 최석채 기념비'가 조성돼 있다. 2000년 국제언론인협회(IPI)에서 20세기 언론 자유 수호에 기여한 언론인 50명을 언론자유영웅으로 선정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가 재직한 매일신문사가 중심이 되어 지역민들의 뜻을 모아 고향인 김천 직지문화공원에 기념비를 세웠다. 옆에는 그의 올곧은 정신이 녹아 있는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을 새긴 비(碑)가 함께 자리한다.

기념비에는 "몽향은 우리 언론사에 크게 새겨질 정론의 대논객이었고 직필의 참언론인이었다. 서민의 옹호자. 여론의 목탁, 민주 언론의 기수, 정의 사회 구현의 선봉장이었다. 독재 정부에 저항하다 옥고를 치렀고, 무능 정부의 국정 혼란을 가차없이 경책했으며, 군사정부의 독단과 폭거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권력의 감시와 탄압에 굴복하지 않았고, 폭력의 협박과 공갈에는 오히려 완강하게 항거했으며, 시종일관 의연하고 당당했다"고 새겨져 있다.

최석채는 자유당 정권이 정치행사에 자주 학생을 동원해 학업에 지장을 초래하자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로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이로 인한 필화(筆禍)로 신문사는 테러를 당하고 그도 옥고를 치르는 등 곤욕을 치른다.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

당시 임병직 주UN대사가 대구 동촌비행장에 도착할 것에 대비, 당국이 환영행사를 위해 수백여 명의 중'고생들을 연도에 도열시켰다. 하지만 비행기가 연착한데다 늦더위로 학생들이 쓰러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몽향이 이를 비판하는 사설을 1955년 9월 13일자 매일신문에 실었다.

그러자 이튿날 오후 4시 25분쯤 대구 태평로에 있던 매일신문사에 불똥이 떨어졌다. 곤봉과 해머를 든 괴한 20여 명이 신문사에 난입해 욕설과 고함을 지르며 공무국의 문선케이스를 비롯하여 인쇄기 및 통신시설, 그리고 공장 내부를 닥치는 대로 파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괴한들은 만류하던 직원들을 구타하는 한편, 지방으로 발송하려고 준비 중이던 신문을 탈취하였다. 일부는 2층 사무실 집기를 부수고 기물을 파손하는 등 난동을 부렸다. 약 10분간에 걸쳐 벌어진 일이었으나 사전에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듯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난동을 부려 피해상황은 매우 컸다. 백주에 신문사가 테러를 당한 것이다. 이와 관련 경북경찰청 간부가 남긴 "백주의 테러는 테러가 아니다"는 말은 당시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사설을 쓴 몽향도 무사하지 못했다. 그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기소됐다. 혐의는 논설의 내용을 북한의 평양방송이 인용하여 선전에 사용하였고 적성감시위원단의 사기를 높여주어 국헌을 문란케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1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어 고법에서 패한 검찰이 대법원까지 상고했으나 이듬해 5월 8일 대법원 전원 합의하에 무죄가 확정됐다. 몽향의 용기 있는 투쟁이 폭력을 앞세운 권력을 굴복시키고 승리를 거둔 사건으로 한국 정치사와 언론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저항정신으로 일관한 참언론인

몽향 최석채는 1917년 경북 김천시 조마면 신안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김천에서 보낸 그는 1942년 일본 주오대학(中央大學) 법학부를 졸업한다. 동경서 고학을 했던 몽향은 학비를 벌기 위해 잡지 '법제'(法制)의 편집기자로 언론과의 인연을 맺었다. 광복 후 1946년 3월 대구에서 발행한 잡지 '건국공론'(建國公論)의 편집부장과 '경북(慶北)신문' 편집국 차장(1946년 7월), '부녀일보'(婦女日報) 편집국장(1947년 12월)을 차례로 맡았다. 건국 후에는 경찰관이 되어 성주'문경'영주 경찰서장 등을 역임하다 6'25전쟁 중 부산에서 일어난 5'26 개헌 파동 소식을 접하고 사표를 냈다. 몽향은 그의 생애 중 경찰서장 재임 기간과 1960년 7월 사회대중당 공천으로 대구에서 민의원에 출마하느라 잠시 한눈을 판 것 외에는 한결같이 언론을 지켜온 외골수 언론인이었다.

몽향은 1954년 대구일보 부국장으로 다시 언론인으로 돌아온다, 이듬해 2월 대구매일신문사로 옮겨 편집국장이 됐고, 6개월 후에 주필직을 맡았다. 그해 9월에 '학도를 도구로…' 사설로 필화를 당해 30일간 옥고를 치른다.

매일신문 사설은 당시에 전국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발행 부수가 몇 개월 만에 배로 증가할 만큼 진가를 높였다. 수난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되었다고나 할까? 그러나 필화사건을 겪은 몽향은 이를 계기로 매일신문을 떠난다. 자유당 정권이 그를 그냥 두지 않았다. 몽향은 1959년 10월 조선일보 논설위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쓴 사설 '호헌구국운동 이외의 다른 방도는 없다'는 단순한 사설이기보다는 격문이었고 이것이 바로 4'19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을 받았다. 5'16 쿠데타 이후 비상사태 임시조치법으로 정치비판이 봉쇄되자 무(無)사설 12일이라는 보기 드문 저항을 했다. 또 1964년 언론파동 때 언론윤리법 반대투쟁위의 핵심으로 박정희 대통령과 담판을 지어 악법을 유보시킨 것을 평생의 자랑으로 여겼다.

1971년 12월 국가보안법이 날치기 통과되자 '신문은 편집인의 손에서 떠났다'고 개탄하며 조선일보 주필 자리를 떠났다. 몽향은 말년에 매일신문 명예회장으로 복귀해 1981년부터 6년간 '몽향칼럼'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치다 1991년 서울에서 타계한다. 그는 태어난 김천 조마면 신안리에 묻혔다.

◆영원한 언론인 삶을 산 몽향 최석채

추석을 며칠 앞두고 김천 조마면에 있는 몽향 묘소를 찾았다. 주민들은 태풍 '산바'가 남긴 생채기의 흔적을 지우느라 여념이 없었다. 주민들의 시름에도 마을 앞 들녘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감나무에는 홍시가 달리고 밤나무에는 알이 들어찬 밤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바야흐로 결실의 계절이다. 나무들도 울긋불긋 가을옷으로 단장에 나서고 있다.

묘역에 들자 추모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비문에는 '정론직필(正論直筆)의 수범을 몸으로 실천한 대논객이요. 한국 언론계를 대표하는 지사기질의 언론인이다.(중략) 파사현정(破邪顯正)의 정론을 펴면서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강직한 성품에 반골과 저항의 선비정신을 지녔다. 늘 약자 편에 서서 칠순이 넘도록 건필을 휘두르는 현역으로 활약했다'고 새겨져 있다.

몽향의 묘소는 소박하다. 아담하고 단아하게 조성된 묘역은 그의 성품을 닮은 듯하다. 몽향이 말년에 한 언론과 인터뷰에서 한 말을 옮겨본다 "권력자는 은퇴 후에도 화려한 영광의 기억이 남고, 경제인은 은행계좌에 남아 있는 재산이 있지만 신문인(新聞人)은 신문을 그만두면 기사 스크랩과 자존심 외에는 없어요. 언론인이 자신에 대한 자존심을 버렸을 때 언론의 사명감이 없어지고 언론이 사명감을 망각했을 때 언론의 권위는 떨어지는 겁니다. 옛말에'내가 나 자신을 업신여긴 후에야 다른 사람이 나를 경멸한다'(人必自侮之然後 人侮之)는 말이 있어요. 차라리 굶어죽더라도 자존심을 끝가지 지켜 무덤에까지 가지고 가라는 말을 나 자신과 동료, 그리고 후배들에게 해왔습니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