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지상 백일장] 이웃사촌/빗길 운전/세톨박이의 행복/이별

♥수필1-이웃사촌

가까이 사는 친정엄마와 같이 점심이나 먹자 싶어 엄마에게 갔던 날이다.

어딜 그렇게 전화를 하고 계시는지 내가 온 지도 모르고 전화 수화기만 잡고 계시는 게 아닌가. 가까이 다가가보니 상대편은 받지도 않는데 신호음만 연신 듣고 계시는 중이었다. 수화기를 놓자마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엄마에게 무슨 일 있냐고 여쭈어보았다. 엄마는 동네 할머니 한 분이 가게에 안 오신 지 이틀이나 됐다고 하신다. 그게 무슨 큰일이냐고 되받아 묻는 나에게 물건 살 게 없어도 하루에 한 번 혹은 두세 번도 다녀가시는데 이틀이나 안 오시고 전화도 받지 않는다며 할머니 댁에 가봐야겠다며 급하게 나가셨다. 조금 있으니 엄마가 충전기와 핸드폰을 가지고 오셨다. 할머니가 다리가 너무 아프셔서 화장실도 기어가시고 핸드폰도 충전이 되어 있지 않아 자식들에게 전화도 못 걸었다 하신다. 혼자 사시는 할머니가 식사도 제대로 챙겨드시지 않고 입맛이 없어 물만 드셨던 모양이다. 이틀을 꼬박 그러고 계셨으니 엄마가 가보지 않았더라면 큰일날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전된 핸드폰에서 대구에서 가까이 사는 아들 번호를 찾아 전화를 걸어 할머니 얘기를 해주시고는 어느새 뽀얗게 끓인 죽 한 그릇과 충전된 핸드폰을 내게 주시며 할머니께 갖다 드리라고 하신다. 살짝 열린 대문을 밀고 할머니 댁으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좀 전에 옆집 사람이 갖다준 거라며 죽 한 그릇을 앞에 두고 힘없이 앉아 계셨다. 혼자 사시는 외로움에 멀리 사는 자식들의 그리움에 하루하루가 즐겁지 않으셨을 할머니를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았다. 쪼글쪼글해진 할머니 손을 잡아 드렸다. 따뜻하고 안쓰러운 손이었다. 아파트 생활에 익숙해진 우리들에겐 이웃사촌이란 말이 무색해지는 요즘이다. 하지만, 할머니와 엄마를 보고는 그래 맞아. 추석 때나 만날 수 있는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내 이웃사촌이 좋음을 깨닫는 날이었다.

이길선(대구 수성구 수성1가)

♥수필2-빗길 운전

'산바' 태풍으로 아이들 학교에서 임시휴업 한다는 문자가 왔다.

참으로 다행이다 싶었지만 아내는 경차를 몰고 출근길에 나섰다.

오늘 하루는 쉬었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했지만 어쩔 수 없이 "잘 다녀와! 도착하면 전화해" 해놓고 마음이 조마조마한 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골이 좋아 고향을 택한 남편을 배려하고 아이들도 시골의 정취를 느끼며 마음껏 사색하고 꿈을 키워가라며 대구에서 이곳 청도까지 이사를 하게 되었고, 아내는 여전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먼 길을 출퇴근한다.

가벼운 차는 바람 심하게 부는 날 휘청거린다면서 짐을 잔뜩 싣고 다녀야겠다더니, 기름 값 많이 든다며 다 비우고 운전하는 아내다.

도착해야 할 시간이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다. 운전 중일까 봐 전화도 못 하고 마냥 기다린다. 학교 안 간 아이들은 그저 좋아 떠들어 대고, 도무지 멈출 것 같지 않은 빗소리는 요란하기 짝이 없다.

잠시 후 '무사히 도착'이라는 문자가 오기에 잽싸게 전화를 걸었다.

"속도 낼 수가 없어 기어왔어. 속도 조금 내니 바퀴가 공중에 뜨고, 살살 기니까 땅에 붙어서 굴러 가더라."

아내는 10부제 안 걸리는 경차가 편하고 좋다고 하더니 이번 태풍으로 많이 놀란 듯한데 "차 바꾸자"고 할 줄 알았더니 다음엔 버스를 타고 가야겠다고 한다. 속으로 얼마나 미안하고 고마운지.

박순원(청도군 운문면 대천리)

♥시1-세톨박이의 행복

젖은 밤송이 꼬챙이로 깐다

쭉정밤도 있지만

큰 밤 작은 밤

가시 문 열리기 바쁘게 나온다

봉투에 담아와

씻어둔 밤 속에

세톨박이 한 덩이가

고만고만한 무게로 다정하다

가운데 밤을 중심으로 양쪽에 붙어

씨눈 가까이 대고 떨어질 줄 모른다

애써 떼어놓으니

가톨 일어나지 못하고

가운데 밤을 치우고 붙여보니

틈이 생기고 씨눈 엇갈린다

서로가 소중한 세톨박이

떨어질 수 없는 행복을 본다

김만순(김천시 다남2리)

♥시2-이별

상여곡 아린소리, 엄마 산을 오르신다.

솔바람 서늘한 골, 목이메인 산 꿩 울음

꽃지는 젊은 청춘을 혼자 긴 밤 묻었으라.

무명베 이불깃에 달빛 환히 머무는 밤

산초 알 눈망울들 그 빈 가슴 비빌 언덕

뒤늦은 회한을 안고 흐느끼는 젖은 우레

어느 별 한가운데 높은 다락 귀히 앉아

길섶에 몸을 누인 풀잎인양 낮춰만 살던

이승에 고달픔 풀고 극락선경누리소서

조정향(대구 중구 대봉1동)

※지난주 선정되신 분은 이석우(대구 달성군 다사읍) 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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