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定石): 사물의 처리에 정해져 있는 일정한 방식.'
'편법(便法): 정상적인 절차를 따르지 않은 간편하고 손쉬운 방법.'
그런데 정석은 같은 한자말로 다른 뜻이 하나 더 있다. 단어의 유래를 담고 있다.
'정석: 바둑에서 예로부터 공격과 수비에 최선이라고 인정한 일정한 방식.'
바둑에서는 공'수 최고의 방법을 가리키는 말이 정석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종종 편법에 밀린다. 편법이 '꼼수'의 치밀함을 탑재했기 때문이다.
'꼼수: 쩨쩨한 수단이나 방법.'
그래서 진득하다 못해 미련한 정석을 따를지, 간편하고 손쉬운 꼼수(편법)를 따를지 사람들은 늘 고민한다. 그 세태를 살펴봤다.
◆공부의 정석? 공부의 꼼수!
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인 황모(18) 군은 요즘 한 인터넷 카페에 매일 접속하고 있다. 친구들 사이에 유행하는 온라인 게임'유럽축구'연예인 관련 카페가 아니다. 공부 관련 카페다. 카페에서 수학 문제 풀이 비법을 얻는단다.
"연습장 절반을 가득 채워야 하는 수학 문제 풀이를 단 몇 줄로 간단하게 설명해줍니다. 일종의 '꼼수 풀이'죠." 160만 명이 넘는 회원을 보유한 이 카페는 국내에 잘 알려진 '수능 커뮤니티'다. 수능 관련 정보 등 다양한 메뉴가 있는데 이 가운데 꼼수 풀이 메뉴가 단연 인기다. 게시물에는 '내신 점수 잡기! 수리영역 벼락치기! 풀이과정을 줄여봅시다!'라는 구호(?)가 머리말로 적혀 있고, 복잡한 수학 풀이 과정과 이를 간단하게 줄인 풀이 과정이 위아래로 적혀 있다.
황 군은 "유명 강사들의 동영상 강의를 통해서도 꼼수 풀이를 접한다"며 "꼼수 풀이 외에도 논술 시간 줄이는 방법, 내신 벼락치기 방법 등 다양한 꼼수 공부 방법이 적힌 게시글이 매일 올라온다"고 말했다.
진득하게 달라붙어 원리를 이해하며 문제를 푸는 정석 공부보다 빨리빨리 정답만 뽑아내는 꼼수 공부가 청소년들 사이에 유행하고 있다.
이는 지난 50여 년간 수학 공부의 절대 지침서였던 '수학의 정석'의 인기가 다소 떨어지고, 실전 문제 풀이 위주의 다른 수학 참고서가 뜨는 모습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모 고등학생용 수학 참고서는 '고등학생 2명 중 1명이 보는' 수학 지침서로 유명하다. 이외에도 2개 출판사의 수학 참고서가 인기를 끄는 등 중'고교생용 수학 참고서는 현재 4파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는 게 업계의 분석. 특징은 수학의 정석 외에 다른 후발업체들은 책에 지루한 개념 설명보다는 많은 양의 실전 문제와 풀이를 수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황 군은 "빨리빨리 문제 풀이를 해 주는 실전형 참고서일수록 친구들 사이에 인기가 많다. 그래야 점수도 팍팍 오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양상은 수학뿐만 아니라 다른 '사교육' 분야에도 적용되는 분위기다. 주부 김모(50) 씨는 중학교 3학년인 딸을 사교육 없이 키웠다. 하지만 최근 왠지 모를 불안감에 학원 한 곳이라도 보내볼까 생각 중이란다. 김 씨는 "공부의 제왕, 공부의 신, 1등 공부법, 서울대 보내는 공부법 등 각종 TV 프로그램이나 책 등의 제목부터 '알려주는 비법대로 하면 1등을 할 수 있고, 서울대에 갈 수 있다'고 유혹한다"며 "특별한 비법을 알려주는 것은 아니지만 따라하지 않을 수도 없다. 친구들은 선행 학습 등 각종 공부 비법을 배워 치고 나가는데 평범하게 공부하면 혼자 뒤처지고, 교우 관계에서도 이탈될 수 있어서다"고 말했다.
◆취업도 벼락치기 꼼수로
정석과 꼼수 사이에서 저울질하는 세태는 청소년들만의 얘기는 아니다.
대구 한 대학가의 서점. 실내 중앙의 3개 벽면을 취업과 자기계발 관련 서적이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에 잘 띄는 책들의 제목을 열거하면 대충 이랬다. 하루 만에 끝내기, 단박에 끝내기, 무작정 따라 하기 등이었다. 최근 실용서적 베스트셀러 제목에 자주 붙는 표현이다. 이들 책 내용과 구성을 요약하면 '책이 알려주는 비법대로 따라하면 단시간에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관련 정보나 지식을 모두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해를 돕는 자세한 해설보다는 기출 문제 위주가 대부분이다. 중'고교 때 접했던 '속성' 참고서가 대학과 취업 공부에도 이어지고 있는 셈.
특히 국내 모 기업의 적성검사 수험서 제목은 이랬다. '7일 벼락치기 실전모의고사'. 한 기업에서 수십 년 동안 일할 인재가 되는데 단 7일의 노력만 투자하면 된다는 것일까?
이에 대해 취업준비생 김모(27'대구 수성구 범물동) 씨는 할 말이 많다고 했다. "기업 공채 시즌은 늘 한꺼번에 몰립니다. 주말마다 시험 치러 다니느라 눈코 뜰 새가 없어요. 지망한 기업에 대해 이것저것 충실하게 준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일명 '뽀개기'(한 온라인 취업 커뮤니티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단번에 이뤄낸다'는 뜻)류 수험서를 구입해 달달 외우죠."
김 씨는 최근 이러한 수험서와 함께 인문서적 베스트셀러도 몇 권 구입했다. 책 제목은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김난도 저)와 '달팽이가 느려도 늦지 않다'(정목 스님 저). 김 씨는 "진득하게 기다리고, 때로는 시행착오도 겪으며 인생을 '정석으로' 산다는 것은 그저 책 제목일 뿐이다. 취업 공부를 하다 잠시 쉬는 시간에 읽으려고 구입한 책들일 뿐"이라며 과잉 해석을 피했다.
◆즐거운 꼼수도 있다
살펴보니 현대인들은 각박한 인생살이를 헤쳐나가기 위해 정석 대신 꼼수를 선택하고 있다. 그런데 사실 청소년과 젊은이들은 소박한 꼼수를 쓰고 있는 셈이다. 정치인이나 기업 등이 비리를 감추거나 부당 이익을 얻기 위해 각종 '악성' 꼼수를 쓰는 세태는 신문기사를 통해 익히 알려져 있다.
가볍고 재미난 꼼수도 있다. 인생을 즐기는 방법으로 여기저기서 시도하고 있다.
직장인 김정호(38) 씨는 어릴 적 추억의 오락실 게임을 떠올렸다. 맞벌이를 하는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하교 후 반나절을 100원짜리 동전 몇 개로 즐겁게 보내도록 해 준 일명 '얍삽이'(꼬로미)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얍삽이는 사촌형이 알려 준 거예요. 특정 버튼을 순서대로 눌러 조작하면 게임 속 캐릭터가 죽지 않는 '무적'이 됩니다. 당시 오락실 주인아저씨께는 참 죄송한 일이었지만 많은 친구들이 즐거운 추억을 쌓았죠."
요즘도 마찬가지다. 각종 컴퓨터 게임 속 꼼수가 즐거움을 주고 있는 것. 게임 관련 사이트나 커뮤니티에서는 신작 게임이 출시되면 마니아들이 며칠 안에 공략 꼼수를 발견, 공유한다.
게임 속 '치트키'도 같은 맥락이다. 치트키란 원래 개발자가 게임을 테스트하기 위해 입력하는 암호다. 게임 마니아들이 이를 알아내 꼼수로 여기면서 인기를 끌었고, 이제는 게임 개발사에서 일부러 유출해 마케팅 전략으로 활용한다. 국내에서 큰 인기를 얻은 '국민 게임'인 '스타크래프트'의 각종 치트키는 유행어가 됐을 정도다. 대표적인 치트키는 'show me the money'(쇼 미 더 머니). 자판으로 이 문구를 입력하면 게임 속에서 각종 병기를 생산하는 데 필요한 자원 1만 점을 얻을 수 있다.
대중문화 속에서도 꼼수는 흥행 소재다. 사회상을 오롯이 투영하는 대중문화 장르인 영화를 보면 알 수 있다. 뒷골목 싸움꾼들의 싸움 잘하는 비법을 알려준 '싸움의 기술'(2005), 화투꾼들의 화려한 손기술과 암투를 보여준 '타짜'(2006), 증권가의 주가 조작 범죄를 실감나게 재연한 '작전'(2009) 등이 인기를 얻었다. 최근 1천만 명이 넘는 관객몰이를 한 영화 '도둑들'(2012)도 각종 훔치기 꼼수를 망라한 작품이다. 이러한 '치밀하고 세밀한 꼼수 체계'를 보여주는 영화는 거의 매년 박스오피스 상위에 랭크되고 있다.
◆정석과 꼼수 사이 '이중 잣대'
그런데 직장인 곽모(29'여) 씨는 꼼수 영화보다 '정석 영화'가 더 큰 감동을 준다고 반론한다. 그는 "영화를 보면 끝까지 정석을 추구하며 실패를 감수하고 심지어 죽음까지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며 "주인공의 멋진 생각과 행동에 감동한다. 출세를 위해 꼼수를 쓰지 않아서다. 대표적인 영화가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자기 소리를 지키려다 쓸쓸한 결말을 맞이한 '서편제'(1993)다"고 말했다.
하지만 곽 씨는 현실에서 자신이 그러한 '새드 엔딩'(sad ending)을 맞이하는 것은 싫다고 했다. "영화는 영화일 뿐입니다. 현실에서는 미련한 정석보다는 효율적인 꼼수를 써서 빠르게 성공하고 싶죠." 현대인이 정석과 꼼수를 바라보는 '어쩔 수 없는' 이중 잣대란다.
이에 대해 교육 전문가들은 과도한 경쟁 탓에 쉽게 꼼수를 선택하는 청소년기에서 원인을 찾는다. 김정금 참교육학부모회 정책실장은 "사교육으로 배우는 '꼼수 풀이'는 장기적으로 보면 효과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꼼수 풀이는 그 효과를 얻기보다는 일제고사'수능 등 일상화된 대단위 시험의 경쟁 속에서 느끼는 불안을 지우기 위해 청소년과 학부모들이 찾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러한 '경쟁 속 불안'은 성인이 된 이후에도 구직 활동이나 직장 생활 등을 하며 피할 수 없기 때문에 꼼수를 찾는 행동 역시 계속된다는 것.
김건찬 학교폭력예방센터 사무총장은 "교육이란 모든 학생들이 자기 소질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본질이다"며 "'꼼수'란 그저 단편적인 경쟁에서 이기기 위한 방법이지만 '정석'이란 장기적으로 자기 소질을 발견하도록 도와주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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