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나의 살던 고향은] (64) 최규목 시인의 포항시 기계면 봉계리

넓은 벌 펼쳐지고, 기계천 위돌아 나가고… 향수처럼 아련한 '풍경'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속칭 관평마을. 뒤로는 봉좌산이, 앞으로는 기계천과 넓은 벌이 펼쳐져 노랫말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속칭 관평마을. 뒤로는 봉좌산이, 앞으로는 기계천과 넓은 벌이 펼쳐져 노랫말 '향수'가 떠오르는 내고향이다. 고향길에 초가을 코스모스가 활짝 피었다. 아! 그때 그 코스모스…. 초등학교 때 전교생이 모여 씨를 뿌리고 물을 주며 가꾸던 그 꽃길이다. 유년시절이 흐드러진 꽃잎처럼 피어난다. 김태형기자 thkim21@msnet.co.kr
학창시절 취업 준비할 때 책과 시름하던 추억이 녹아있는 봉강재. 지금은 동네 형님이 재실을 관리하고 있다.봉강재에는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신달 장군을 모신 사당과 부속 건물들이 있다.
학창시절 취업 준비할 때 책과 시름하던 추억이 녹아있는 봉강재. 지금은 동네 형님이 재실을 관리하고 있다.봉강재에는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신달 장군을 모신 사당과 부속 건물들이 있다.
고향길에 동행한 신홍식(왼쪽) 아트빌리지 대표, 구석본(오른쪽) 대구문인협회장과 함께 기남초등학교를 찾았다. 교정 한쪽을 지키고 서 있는 아름드리 숲이 아직도 일품이다. 학교는 폐교돼 봉좌마을 기업으로 새단장 중이다.
고향길에 동행한 신홍식(왼쪽) 아트빌리지 대표, 구석본(오른쪽) 대구문인협회장과 함께 기남초등학교를 찾았다. 교정 한쪽을 지키고 서 있는 아름드리 숲이 아직도 일품이다. 학교는 폐교돼 봉좌마을 기업으로 새단장 중이다.
최규목 시인
최규목 시인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기계면 봉계리 256번지, 속칭 관평은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이다. 기계라는 지명은 형산강의 지류인 기계천 주변에 옛날부터 구기자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구기자 杞자와 시내 溪자를 써서 기계라고 불렀고, 봉계리는 봉좌산에서 흘러내린 계곡의 중간이라고 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관평은 고려의 개국공신인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신달 장군의 묘가 있어 후손들이 관청을 설치하고 관평(官坪)이라 했다고 전한다. 우리 마을은 봉계 숲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윤태사에서 뻗어나온 산 능선을 따라 20여 호가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전형적인 농촌형 산촌 마을이다. 나는 여기서 태어나 중학교를 졸업하고 16살에 고향을 떠났다.

기계면 소재지에서 기계천을 건너면 봉계리로 가는 길이다. 아직도 코스모스가 듬성듬성 피어 옛 추억을 자아내게 한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초등학교 전교생이 이 꽃길을 조성하던 때가 주마등처럼 떠오른다. 씨를 뿌리고 여름 더위에 물을 주어 가꾸었던 꽃길이 당시에는 4㎞ 정도 되었다. 그때 교장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힘든 세상을 살아가는 인내심과 어려운 환경에서 꽃을 통해 마음을 순화시키는 방법을 가르쳐 준 셈이다. 꽃길은 이제 콘크리트 도로 때문에 듬성듬성 길 좌우 풀섶에서 그나마 무리지어 꽃을 피우고 있어 옛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지금은 폐교가 된 기남초등학교 교정에 들어서니 주변을 돌보지 않아 잡풀들만이 나를 반겨주고 있다. 건물 하나하나에 옛 추억이 묻어 있다. 지금은 농기구 창고가 된 도서실에서 빨간 전집으로 된 이순신, 세종대왕, 장영실 등 위인전을 밤새워 읽던 기억, 저녁 늦도록 촛불을 켜고 중학교 입시준비를 하던 6학년 교실, 학교 옆 숲 속에서 꽃밭을 조성하던 추억들, 당나무를 타고 올라 매미를 잡던 기억, 주변의 풍경 하나하나에 얽힌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간다. 그 많던 선배와 동기, 후배들은 다 어딜 가고 학교는 폐교가 되어 새롭게 봉좌마을 기업으로 단장하고 있다. 운동장 구석에 미끄럼틀과 철봉대는 수십 년간 주인을 기다리며 녹슨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시간이 더 지나면 학교도 없어질 것 같은 불안한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쓸쓸하다. 주변을 둘러보니 학교는 봉계 숲과 봉좌산으로 둘러싸여 더 없이 풍광이 아름답다. 이곳을 스쳐간 수많은 졸업생은 어느 도시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며 가끔은 고향 생각을 하며 살아가고 있을까?

고향을 떠나온 지가 어언 40년이 되었다. 젊은 시절에는 자주 찾지 못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자주 고향을 찾게 된다. 옛날보다 교통여건이 좋아진 원인도 있지만 주변의 나이 드신 친척분과 친구들의 부모님 부음을 접하고 이 길을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때로는 친구들의 자녀 혼사 때문에 기계천을 건너 흐릿한 불빛, 사과향과 유황향이 밴 이 작은 마을을 곡예하듯 찾고 있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니 옛 집터는 잡초가 무성히 자란 채마밭으로 변했다. 주변 집들도 많이 변했다. 마음속의 고향은 언제나 노랗게 삭은 유년과 그 시절에 버짐을 달고 다니는 소년과 소년이 쫓아다니던 청설모의 종아리가 왜소한 풍경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을 풍경은 풍성한 들판과 짙푸르게 윤기 나는 솔숲과 뒤뚱거리며 달아나는 노루 떼와 잘 정렬된 벽돌 담장과 낯선 노파들이 호기심으로 바라보는 마을이 되었다. 산천은 유구하고 인걸은 간데없다고 옛 시인은 통탄했으나 지금 내 눈에 비친 시골 고향 풍경은 인걸도 산천도 모두 변하여 낯설기만 하다. 어린 시절 우리들은 올챙이처럼 이웃하여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학교를 파하면 소를 먹이고 소풀을 베고 여름에는 시냇가에 가서 목욕을 하고 겨울 긴 밤에는 화투놀이'윷놀이 등으로 시간을 보냈다. 베이비붐 세대인 우리들은 유난히도 경쟁하면서 세상을 살아왔다. 중학교부터 시험으로 진학하는 시대를 살았다. 시골에는 고등학교가 없어 뿔뿔이 흩어져 포항으로, 경주로, 대구로, 서울로 흩어졌다. 진학하지 못한 여자 아이들은 스무 살도 되지 않아 시집을 갔고 이웃에 살던 순희도 어린 나이에 시집을 갔다가 청상이 되어 친정으로 돌아와 물레를 타곤 하다가 서러운 눈물을 흘리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며 살고 있는지 궁금하다. 항상 어머니는 시골집 장독대가 있는 뒤편에서 피마자기름에 밀가루 풀빵을 부쳐 자식들에게 먹이곤 했다. 이제 어머니도 가고 집조차 헐려 버린 옛 집터에 서니 만감이 교차할 뿐이다.

봉강재는 파평 윤씨의 시조인 윤신달 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장군은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왕건을 도와 후삼국을 통일하고 경주 부윤으로 부임하여 30년 동안 선정을 베풀다가 죽어 우리 마을에 묻혔다. 이 건물과 묘소는 오랫동안 찾지 못하다가 영조 15년 파평 윤씨의 28대 자손인 윤광소가 문헌을 더듬어 땅속에 묻힌 비석을 발견하고 태사공의 묘소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묘의 봉분을 돋우고 표석을 세우고 재실을 지었다. 재실은 언제나 객지 생활에 좌절하고 돌아온 나를 말없이 보듬어 주었다. 나는 재수를 할 때도, 제대 후 취업준비를 할 때도 이 재실에 거처를 정하고 공부를 했다. 묘소 앞에 앉으니 재실 주변의 대숲과 묘지 주변에 사방으로 둘러싸인 적송들, 적송 너머 멀리 흐르는 기계천이 정지용의 향수의 그곳과 진배없다. 객지생활을 하다 고향에 돌아와 봉강재를 관리하는 친구 형에게서 객지에 나가 살고 있는 친구들과 이웃들의 소식을 들었다. 즐거운 소식도 있고 흉흉한 소문도 있지만 그래도 형이 고리가 되어 친구나 지인들의 안부를 들으니 가슴 한구석이 훵하니 뚫린 기분이 든다.

운주 구봉 아래 장군 묘 한기/ 고요가 적적하여 천년토록 고독하다/ 주변도 닮아 있어/ 저 노송/ 고독이 결연하다.('윤태사에서' 전문)

우리 시대가 다 그러했지만 삶이란 언제나 생존 경쟁으로 이어지고 그것은 약육강식의 논리로 통했다. 지금도 '그때 왜 그렇게 했을까?' 하는 생각들이 반복된다. 학교를 파하면 물총새의 서식지를 찾아 긴 작대기로 새집 구멍을 마구 쑤셔 깨어진 알을 꺼내어 버리던 일, 배가 고프면 소나무를 타고 올라 왜가리'백로 알을 꺼내어 일그러진 냄비에 삶아 허기진 배를 채우던 일, 부화되지 못한 생명들이 우리들에 의하여 짓밟히고 가을 어느 날 식솔도 없이 남으로 날아가는 새떼를 보며 내 유년은 죄의식으로 시달리곤 했다. 그 죄의식은 은빛 고기떼가 갈매기를 몰고 다니는 연평도의 참호 속에서도, 이 도시의 목로주점에서도 종양처럼 매달려 떨어지지 않고 있다. 내가 시를 쓰는 연유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나로 인하여 삶이 유린당하고 아파하는 많은 생명 있는 것들, 아니 무생물에게도 경건한 기도를 올려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이다. 늦게 깨달은 생명의 존귀함은, 기독교적으로 이야기하면, 태어날 때부터 지은 죄와 살아가면서 지은 죄를 더한 '원죄+α'다. 다음은 '원죄+α'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상념이 흩어진 간이역/ 강켠에서 인 찬바람이/ 온기로 익어 가는 자락에 왜가리, 백로떼가 평화롭다/ 마흔의 가슴을 지배해온 억압의 근원이/ 저 새떼로 인한 것이라면 원죄에서부터 쌓인 내 죄의 질량이 얼마일까/ 골고다의 그와 안면(安眠) 못하는 누이의 사함으로 대신할 수 있을까/ 이제, 노을이 지기 전/ 내 의식의 강 위에 부표로 뜬 죄의 뗏목을 사르면서 살 수 있을지.

고향을 돌아 나오면서 자식들 세대에 대하여 생각해보았다. 도회의 산부인과병원에서 태어난 그들에게 고향이란 과연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고목이 즐비한 이 숲과 숲 속에서 살아가는 곤충과 야생식물들, 철 따라 온갖 꽃이 피는 들판과 각양각색의 산나물과 약초가 자라는 산들, 이런 것들을 그들의 가슴속에는 없기 때문에 절절한 시적 사유도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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