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만남의 기쁨, 헤어질 때까지 쭉∼ 명절 활력소 '대화의 기술'

성적·결혼·취직·선거 피해야 할 화제 들먹였다간…

이번 추석에는 가족과 친척들이 모두 모여 '묵언수행'을 해보는 건 어떠신지요? 친척과 만나면 서로 추석선물 세트나 주고받으며 미소만 살짝 짓고 덕담은 생략. 차례 지내고 음복을 핑계삼아 하루 종일 이어지는 술자리에서도 그저 술만 홀짝이고 대화는 생략. 모두들 말 없이 동태전과 송편을 집어 먹으며 TV나 보다가 각자 집으로 '깔끔하게' 헤어집시다.

왜냐고요? 평화를 위해섭니다. 무심코 던진 말 한 마디에 상대방은 '총맞은 것처럼' 아픈 때가 바로 추석을 비롯한 명절이거든요.

실은 지금까지 우스갯소리 좀 해본 겁니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가족과 친척끼리 어떻게 이야기꽃 피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안 한 것만 못한 이야기는 금물입니다. 상처만 주는 명절 의사 소통 사례와 주의사항 등을 알아봤습니다.

◆성적 질문, 초교생들도 "스트레스"

"9월 29일. 오늘은 한가위 D-1일. 하지만 나 같은 고3 수험생들에게 오늘은 수능 D-40일일 뿐이다. 차례 지낸 뒤 밥이나 먹고 빨리 방에 들어가서 수능 공부를 할 생각이다. 삼촌과 고모들이 붙잡고 "공부 잘되느냐" "어느 대학에 갈 거냐"고 묻기 전에 말이다. 특히 큰아버지가 약주 한 잔 걸치시고는 나처럼 고3인 사촌형제들을 모아 놓고 '진로상담'을 하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독서실도 문을 안 여는데 피신할 곳도 없고 큰일이다."(고3 수험생 황모 군)

"명절에는 친척들 간 자식 자랑 대결을 하는 명절판 '나는 가수다'(한 지상파 방송의 노래 대결 프로그램)가 펼쳐진다. 이름하여 '나는 부모다'라고나 할까? 우리 부모님은 평소 계추 모임에 가서 자식 자랑 대결을 하다 맛 본 쓰디쓴 패배를 이번 추석 때 만회할 생각이신 것 같다. 너무 부담스럽다."(중3 김모 군)

명절은 친척들이 서로 자녀의 안부와 근황을 묻는다며 실은 당사자들에게 마음의 상처와 막중한 부담감을 안기는 때다. 특히 수능을 앞둔 고3들에게는 공부'수능'대학 등 관련된 어떤 질문이라도 스트레스를 남길 수 있다. 혹자에 따르면 추석 명절은 곧 치를 수능에 대한 기대로, 설 명절은 수능 결과에 대한 평가로 전국의 고3들이 수난을 겪는 때다. 물론 고3이 아닌 청소년들도 정도만 다를 뿐 스트레스를 받기는 마찬가지.

한 교육업체가 최근 온라인 홈페이지 회원 82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추석 스트레스 관련 설문조사에서 청소년들은 가장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명절 질문으로 '성적 질문'(39%)을 꼽았다.

대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 박모(39'여) 씨는 "어른들만큼 아이들도 명절 스트레스에 시달린다. 지금까지 과소 평가됐다. 아이들도 명절 연휴를 보내고 등교하면 낯빛부터 다르다. 명절 때 먹은 음식 탓이 아닌 신경성으로 배탈을 앓는 아이도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명절에 자녀를 데리고 다니지 않는 부모들이 적잖다. 주부 강귀영(44'대구 북구 침산동) 씨는 "이번 추석에는 부부만 움직일 예정"이라며 "성적과 대학 진학 계획을 묻는 친지들 때문에 아이도 힘들지만 부모도 대신 대답하느라, 얼버무릴 궁리를 찾느라 스트레스를 받긴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취업'결혼 질문도 이제 그만

"명절에 오로지 성적 질문으로만 스트레스를 받는 중'고등학생 사촌 동생들은 나보다 낫다. 대학 졸업 2년차 '백조'('백수' 대신 여성 취업준비생을 가리키는 말)인 나는 "취업 언제 할 거냐"와 "결혼은 언제쯤으로 생각하느냐"라는 어퍼컷 펀치 두 방을 함께 맞는다. 어린 사촌 동생들은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라며 둘러댈 대답이라도 있다. 나는 할 대답이 없다. 취업과 결혼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인가 말이다. 신문기사에 보니 추석 잔소리를 피하러 '템플 스테이'를 가는 처녀'총각들이 많던데. 나도 그리로 피난이나 갈까?"(28세 늦깎이 취업 준비생 박모 씨)

명절 때 친지들이 퍼붓는 성적 질문 공세에서 벗어나 한숨 돌리던 젊은이들이 이내 다시 맞이하는 '더욱 잔인한' 질문 주제가 바로 '취업'과 '결혼'이다.

취업은 어려운 일이다. 올해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학생이 아닌 15~29세 청년층 454만5천 명 중 51만7천 명은 단 한 번도 취업 기회를 잡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학생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 젊은이 9명 중 1명이 30세 때까지 일자리를 못 구한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결혼 준비가 늦어지는 등의 이유로 초혼 연령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통계청의 '2011년 혼인'이혼 통계'에 따르면 평균 초혼연령은 남성이 31.9세, 여성이 29.1세로 10년 전에 비해 남성은 2.4세, 여성은 2.3세 높아졌다.

결국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르는 처녀'총각들 중 많은 수가 취업 잔소리와 결혼 잔소리를 함께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인 것.

취업 준비생 박모(28'여) 씨는 "그렇다면 노총각과 노처녀의 기준도 바뀌어야 하는데 친지들은 옛날 기준으로 나를 못난이나 문제아로 보고 잔소리를 툭툭 내뱉는다"고 푸념했다.

취업한지 얼마 안 된 미혼의 사회 초년생들도 불만스럽다. 2년차 직장인 장현진(29'대구 중구 대봉동) 씨는 "비싼 집값 등 아직 결혼 비용도 제대로 모으지 못했는데 명절에 결혼 얘기를 들으면 짜증이 난다. 친지들은 취업만 하면 척척 돈도 모으고 순탄하게 결혼할 줄로 안다. 은행 대출 고민만 하고 있다"고 했다.

한 결혼정보회사가 최근 미혼자 회원 382명을 대상으로 '추석 때 쏟아지는 결혼 잔소리에 대한 대처법'을 물었더니 가장 많은 젊은이들이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달라"(남자 32.4%, 여자 24.4%)며 '맞불' 대응을 할 생각인 것으로 조사됐다.

하지만 이에 대해 직장인 장현진 씨는 "결혼할 준비도 안 돼 있는데 실행하기 어려운 대응이다. 젊은이들이 설문조사를 통해 그저 마음 속 분노를 표현한 것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명절 부부 갈등은 시어머니 탓?

실은 명절 이전부터 갈등의 불씨는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부부들 얘기다. 인터넷 한 육아 커뮤니티. 이곳은 평소 육아 정보를 교환하는 곳이지만 요즘은 주부들의 명절 관련 고민 상담 게시글이 잔뜩 올라오고 있다. 다음은 한 주부 네티즌의 게시글.

"명절이면 항상 시댁에 먼저 들렀다가 인근 친척들 집을 순회한 뒤 2시간 거리에 있는 친정으로 갑니다. 보통 설이나 추석 당일 친정으로 이동하죠. 그런데 시어머니께서 이번 추석에는 하룻밤 자고 다음 날 친정으로 가라고 하신 거예요. 그러면서 '편한 대로 하라'고 말끝을 흐리셨습니다. 휴. 어떡하죠?"

명절에 (아내를 기준으로)시댁 다음 친정으로 가는 동선은 차례 등 명절 제례의 진행상 남편 위주로 원만하게 합의된 것이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당일 이동하느냐 다음 날 이동하느냐, 혹은 당일 점심을 먹고 이동하느냐 차례를 지내고 오전에 바로 이동하느냐 등 선택지를 두고 부부들은 첨예한 갈등을 빚는다. 이번 추석처럼 연휴가 비교적 짧은 경우에는 더더욱 갈등이 심해진다.

강귀영 씨는 "명절 노동에 시달린 아내들을 위해 남편들은 과감한 결단력을 발휘, 되도록 일찍 친정으로 출발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주부들은 명절 노동이나 부모님 선물'용돈 관련 스트레스보다 시댁과 친정의 비중에 차별을 두는 것에 더욱 민감해하고 섭섭해 한다"고 말했다.

아무래도 명절에 제례가 진행되는 메인 무대가 '시댁'인 만큼 부부 갈등을 방지하는데 '시어머니'의 역할이 절대적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대구중앙가족상담센터 김주하 원장은 "시어머니의 잔소리는 작은 것이라도 며느리에겐 큰 상처로 남는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결혼 1, 2년차 젊은 부부의 경우 심리적으로 어머니(시어머니)와 아들(남편)의 '애착관계'가 정리가 덜 된 경우가 많다. 아들은 아직 품 속 자식인 셈"이라며 "시어머니가 아들에게나 할만한 잔소리를 무의식적으로 며느리에게 하게 된다. 이게 상처가 되고, 고부갈등의 씨앗도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명절 연휴 동안 꾹꾹 참은 며느리는 잔소리로 받은 상처를 그대로 남편과의 갈등 구도에 녹여 넣게 된다는 것.

김 원장은 "부부들이 겪는 명절증후군이 정말 심각하다. 설과 추석 연휴만 지나면 부부들의 상담 신청이 폭증한다"며 "명절 갈등으로 빚어진 부부 간의 의사소통 단절 관련 상담이 70%가량 차지하는 등 가장 많다"고 말했다.

황희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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