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의 멋쩍은 웃음은 간 곳 없고 긴장 가득한 얼굴로 그는 출사표를 던졌다. 그 자리에서 공약을 일일이 설명하기는 어려웠겠지만, 하나는 분명히 했다. 네거티브를 "정치권 최악의 구태"라 지목하며 "어떤 어려움과 유혹이 있더라도 흑색 선전과 낡은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안철수 원장은 선언했다.
정치 무경험자의 천진난만한 소린가? 하지만 가만히 기억을 더듬으면, 이전에도 많은 정치인들이, 아니 거의 모든 정치인들이 비슷한 선언을 했었다.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지만. 큰 꿈을 안고 도전하는 사람들이 적어도 한 번쯤 그런 생각을 진정으로 갖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왜 네거티브가 정치판을 휘젓는 것일까? 다양한 설명들 가운데 몇 가지만 짚어보자.
먼저 선거판이 인물 중심으로 짜인다. 한 표라도 더 얻기 위해 정당들은 계급적 성격과 이념을 제쳐놓고 대다수 유권자들이 원하는 공약을 개발한다. 그래서 정강'정책은 좌우에서 중간으로 몰리고 모두 엇비슷해진다. 그 결과 정책 대결이 사실상 말싸움처럼 되고, 인물 중심의 선거전이 전개된다. 인물 검증은 개인의 '공과'를 논하는 것이지만, 상대 후보에 대해선 '과'에 쏠릴 수밖에 없다.
둘째, 정치는 승자 독식의 제로섬 게임이다. 한 표 차이로 2위를 해도 얻을 게 마땅찮다. 은메달이나 재계 2위, 베스트 셀러 2등이 누리는 영예나 경제적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아슬아슬한 접전에 몰리면 극단적 수단을 동원하고 싶은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다. 엄청난 인적'물적 자원을 이미 동원한, 인생에 단 한 번의 기회라는 생각이 들면 더더욱 그렇다. 여기에 '어떻게든 당선되면, 잡은 권력으로 뒷수습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한몫 거든다.
셋째, 미움이 사랑보다 강렬하다. 증오야말로 인간을 특징짓는다고 보기도 한다. 새끼나 어미를 죽인 원수라도 다른 동물들은 곧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인간만이 와신상담 복수의 칼을 갈면서 끝끝내 응징하는 '뒤끝 작렬'의 존재다. 이 맹렬한 감정에 도화선을 대고 싶은 충동은 선거 열기가 막바지에 절정을 치달으면서 경쟁심이 적의와 뒤섞이는 순간 통제력의 고삐가 곧잘 풀린다.
마지막으로 미디어 환경은 짧은 도화선이 된다. 특종을 쫓는 불꽃 튀는 각축, 판매 부수와 시청률을 올리기에 혈안이 되는 경쟁 속에서 폭발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뉴스거리는 역시 네거티브다. 평소 범접하기 어려운 인사들의 추악한 속살을 엿보고 욕설을 퍼붓는 기회는 은근히 흥분감마저 감돌게 한다. 여기에 감춰진 진실을 들춰내고 알리는 것이 언론의 사명이라는 정당성까지 갖게 되면 선거판은 삽시간에 아수라장이 되기 일쑤다.
이제 우리의 현실을 보자. 공약들이 다 밝혀진 건 아니지만, 뭐가 다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이 많다. 초미의 관심을 끄는 경제공약을 들여다보면, 여당 후보는 5년 전 '줄푸세'(세금 줄이고, 규제 풀고, 법질서 세우기)에서 좌클릭했다. 야당 후보는 '일자리 혁명'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꼽는다. 무소속 후보는 "경제민주화나 복지도 성장동력을 가진 상태에서만 가능하다"며 자전거의 두 바퀴에 비유한다. 사태가 이 정도에 이르자 공약의 수렴을 넘어 좌우가 뒤바뀐 역전현상이라 꼬집는 견해까지 나온다. 이런 가운데 선명한 정책 대결이 녹록지만은 않아 보인다.
지지율은 오차 범위 내에서 요동치고 있다. 싱겁게 끝난 당내 경선과는 달리 본선은 박빙을 예고한다. 유권자들 사이엔 지지만큼이나 반목도 상당하고, 색깔이 강한 일부 언론은 벌써 편파 보도의 경계를 넘나든다. 작은 오점에도 큰 상처를 입는 깨끗한 이미지로 흠집내기 파상공세를 끝내 참기만 할 수 있을까? 격분한 측근들의 통제까지 자신할 수 있나?
그럼에도 정치 초년생의 말에 희망을 걸지 않을 수 없는 심정이다. 모든 어려움을 다 헤치고 나와 새로운 정치를 열어줄 것을 그에게, 아니 세 후보 모두에게,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의구심과 기대가 뒤엉킨 시선으로 조심스레 선거판을 바라보는 이유는 막스 베버의 말이 마음 한쪽을 꽉 움켜잡고 있기 때문이다. 직업 정치인에 대한 강연을 마무리하면서 그는 말했다. "불가능한 것을 해내려고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가능한 것조차도 이룰 수 없다."
이재정/대구대 교수·사회교육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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