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말과 글, 그리고 국격

개천절(開天節)인 오늘은 이 땅에 하늘이 열린 날이다. 먼 옛날 이 땅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천제(天帝) 환인의 뜻에 따라 아들 환웅이 4천345년 전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와 신시(神市)를 건설하고 그의 아들 단군은 나라를 세운 것이다. 아득히 먼 옛날 펼쳐졌던 우리나라의 건국 이야기는 드라마틱하기가 웬만한 스토리텔링 뺨을 친다.

필자는 단군 개국 신화에 등장하는 환인이 하늘을, 곰'호랑이가 땅을 상징한다고 해석한다. 곰이 마늘을 먹고 백일 동안 지극정성 기도를 드린 뒤 사람이 되어 환웅과 결혼해 개국시조 단군을 낳았다는 신화에는 하늘과 땅, 즉 '이상과 현실의 위대한 유전적 결합'에 관한 심오한 상징이 들어 있다. 한반도는 하늘의 뜻이 실현되는 위대한 땅이라는 건국이념이 단군 신화에 은유되어 있는 것이다.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라'(홍익인간'弘益人間)처럼 숭고한 가치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국가가 우리나라 말고 더 있을까.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천손(天孫), 즉 하늘의 자손이라 불렸다. 우리 민족의 건국신화와 역사를 관통하는 이념에는 임금뿐만 아니라, 빈부귀천 없이 백성 모두가 '하늘의 후손'이라는 이상이 스며들어 있다. 중국과 일본은 자신들의 왕을 각각 천자(天子)'천황(天皇)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그러한 치켜세움은 통치자만을 위한 찬가일 뿐이다,

세월을 건너뛰어, 단군이 나라를 세운 지 3천779년이 지난 음력 9월(양력 10월)에 이 땅에는 다시 한 번 세계사에 유례없는 기념비적 역사가 이뤄진다. 대왕 세종이 우리글 훈민정음을 반포한 것이다. 한 나라의 공식 문자가 창제된 날이 역사적 기록에 남아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뿐이다. 세종대왕은 자주 국가로서의 존엄성을 세우기 위해서, 백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 그것은 혁신이자 복본(復本:근본을 되찾음)이었다

말과 글, 삶, 정신은 떼려야 뗄 수 없는 유기적 관계를 가진다. 그렇기에 말과 글을 통해 민족의 정체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우리말을 곰곰이 살펴보면 가장 중요한 단어들 대부분이 한 글자로 이뤄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언어의 효율성 때문이다. 눈, 코, 귀, 입, 손, 밥, 죽, 해, 땅, 뭍, 샘, 겉, 씨, 솥, 소, 범, 개, 모, 쇠, 벗, 멋, 힘, 옷, 싹, 벼, 짚, 춤, 논, 밭, 집, 흙, 잠, 꿈, 암, 수, 덫, 닻, 품…,

이채로운 것은 한 글자로 된 단어 가운데 우리 조상들이 특히 중요하다고 인식한 말들 대부분은 'ㄹ 받침'으로 이뤄져 있다는 점이다. 물, 불, 팔, 발, 달, 별, 쌀, 들, 밀, 길, 굴, 술, 꿀, 풀…. 어디 그뿐인가. 활, 칼, 절, 결, 탈, 얼, 설, 실, 일, 철, 솔, 올, 꿀, 줄, 딸(우리 조상들에게는 딸이 아들보다 중요했던 모양이다),

그 중요한 단어 목록에 '말'과 '글'도 당당히 들어 있다. 한민족에게 '말'과 '글'은 생존 필수 요소인 '물' '불' 못지않게 귀한 가치를 담은 단어였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전부터 '글'이라는 순우리말이 존재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이 문자의 중요성을 한자 도입 이전부터 인지하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재야 학계에서는 한글의 원형이 기원전 22세기 고조선 때부터 존재한 '가림토' 문자라고 주장하고 있기도 하다.

한글 반포 8주갑(480주년)인 1926년 11월 4일(음력 9월 29일) 조선어학회(지금의 한글학회) 주도로 '가갸날'이 정해졌다. 이후 한글이 1446년 음력 9월 상순에 반포됐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여곡절 끝에 한글 창제 500주년인 1946년 한글날은 10월 9일이 됐다. 이어 1970년 6월 15일 대통령령으로 한글날이 공휴일이 됐지만, 1990년 법정 공휴일에서 제외되고 말았다. 공휴일이 많아서 근로 일수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세종대왕이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노릇이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다시 지정하자는 목소리가 드세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청원과 관련한 설문에서 응답자의 84%가 찬성표를 던졌지만 위정자들은 외면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한글날을 공휴일로 지정하자는 목소리는 오히려 부족함이 있다. 이참에 촉구한다. 한글날을 국경일로 지정하라고. 국격을 세우는 일은 그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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