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채널] 조선 사회 3대 민사소송, 산송(山訟)이 많았던 이유는?

KBS1 '역사스페셜' 4일 오후 10시

KBS 1TV '역사스페셜-임금도 막을 수 없다. 조선의 묘지 소송' 편이 4일 오후 10시 방송된다. 조선시대 조상의 묘지를 둘러싸고 벌어지던 묘지 소송인 '산송'(山訟). 특히 조선 후기의 문중사회에서는 전체 소송의 절반이 조상의 묘소를 둘러싼 다툼이었다.

산송은 당사자에 그치지 않고, 일가와 문중 전체가 사활을 걸고 매달린 다툼이었다. 임금이 직접 나서서 중재해도 해결이 안 될 만큼 그 갈등의 뿌리도 깊었다.

조선시대 관아에 내던 청원서 중 70%가 묘지에 관련된 것이었다. 선산(先山) 영역을 지키려는 사대부 가문의 싸움이 주를 이뤘다. 산송을 겪지 않은 집안이 없을 정도였다. 유교이념이 지배하던 조선사회에서 조상의 묘지 문제는 가문과 가문의 대립이었고, 이는 곧 패싸움으로 번져 사망자가 속출하는 지경에 이른다.

18세기 장안의 화제가 된 대표적인 산송 사건이 있었다. 숙종 38년(1712년), 앳된 얼굴의 선비가 돌연 왕의 행차를 가로막고 아버지의 원수를 처벌해달라며 눈물로 호소한다. 사연의 주인공은 뜻밖에도 17새 처녀 박효랑이었다. 그녀가 남장을 감행하고 왕 앞에 나선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박효랑의 아버지는 묘지 소송에 휘말려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집안 대대로 모시던 조상의 묘지마저 빼앗긴다. 박효랑의 언니 또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다 석연찮은 죽음을 맞는다. 산송으로 하루아침에 아버지와 언니를 잃은 박효랑의 한 맺힌 사연은 전국 유림의 여론을 들끓게 했다. 역사스페셜은 이 박효랑의 산송 사건의 전말을 추적해본다.

산송은 노비 소송, 전답 소송과 더불어 조선 사회 3대 민사소송으로 꼽힌다. 하지만 다른 두 소송에 비해 다루기 까다로웠다.

권성훈기자 cdrom@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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