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들춰보는 것은 매우 불편하다. 거기에는 영광과 환희, 숭고함과 위대함도 있지만 좌절과 슬픔, 감추고 싶고 수치스러운 것도 있다. 이런 영(榮)과 욕(辱)은 시대를 달리해 나타나기도 하고 한 시대에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것이 역사다. 영광만의 역사도, 수치만의 역사도 없다. 그래서 한 국가, 한 민족의 역사 전체는 쉽게 포폄(褒貶)을 허용하지 않는다. 2차대전 후 유럽의 나치 청산의 역사는 이를 잘 보여준다. 전후 유럽의 첫 번째 과제는 나치의 청산이었다. 새 나라의 정통성을 세우고 새 시대를 열기 위해서 이는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유럽의 나치 청산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르다.
1944년부터 1951년 사이 프랑스 법정은 6천763명에게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했지만 형이 집행된 사람은 791명에 불과했다. 또 공무원 1만 1천 명을 포함, 4만 8천723명이 공민권을 박탈당했지만 대부분 몇 년 안에 복권됐다. 이들을 포함, 대략 35만 명이 '숙청'됐지만 신상에 손상은 대체로 없었다. 미테랑도 나치의 대리인인 비시 정권의 공무원이었지만 당당히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수많은 프랑스인이 비시 정권을 전쟁 이전 프랑스의 합법적 계승자로 인정하며 충성했다는 사실에 비춰 프랑스의 나치 청산은 청산도 아니었다.
독일도 예외가 아니다. 서독에서 뉘른베르크 재판을 포함한 각종 전범 재판에서 5천 명 이상이 전쟁 범죄나 반인륜 범죄로 유죄를 선고받았지만 사형선고는 800명이 채 안 됐고 형이 집행된 사람은 프랑스보다도 적은 486명이었다. 독일인 대다수가 자발적으로 나치에 동조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너무나 미약한 청산이었다. 프랑스처럼 공민권 박탈 이후 몇 년 내 복권됐고 공직은 나치 전력자로 채워졌다. 총리 아데나워의 보좌관 한스 글롭케도 유태인과 독일인의 인종 분리를 규정한 뉘른베르크법을 기초한 나치 전력자였다.
동독은 철저한 청산을 자랑했지만 전혀 아니었다. 청산에서 서독보다 약간 더 나아가긴 했지만 공산주의 정권에 도움이 될 만한 경우는 모두 구제했다. 1950년대 초 동독 고등교육기관장의 절반 이상이 나치당원이었으며 10년 후에도 동독 의원 중 나치 전력자는 10%가 넘었다. 정보기관 슈타지는 아예 나치 비밀경찰 게슈타포를 이름만 바꾼 것에 불과했다. 이렇게 해서 주홍글씨를 뗀 나치 전력자는 수백만 명에 달한다. 이탈리아 등 다른 유럽 국가들의 나치 청산도 이와 대동소이했다. 그 이유는 국민 통합이었다. 그러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부역(附逆)의 집단 망각'이었다. 드골의 '위대한 프랑스'와 서독의 '라인 강의 기적'은 이런 부끄러운 역사 속에서 둥지를 틀었다.
딸이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게 한 대선 국면의 현대사 평가는 역사에서 수치만을 분리수거해 그것만이 한국 현대사의 모습이라고 우기는 것과 같다. 역사가 정략(政略)에 이용될 때 역사는 이렇게 왜곡되고 뒤틀린다. 대통령이 되고 싶어하는 딸은 등을 떼밀려 아버지의 무덤에 침을 뱉었다. 그 점에서 딸은 당당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 현대사는 욕(辱)만의 역사로 비쳐지게 됐다.
우리 현대사는 역시 수치와 영광이 절반씩 합성된 야누스의 얼굴이다. 식민지와 민족상잔, 친일 세력의 온존과 부활, 군사 쿠데타와 독재가 그 한쪽 면이라면 세계 최빈국에서 세계 13위의 경제 대국으로의 성장, 쓰레기통 속에서 꽃피운 민주주의는 그 반대 면이다. 이렇게 수치란 씨줄과 영광이란 날줄로 짜인 우리 현대사를 한 전직 대통령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해 온" 역사라고 단정했다. 그런 원한에 찬 언사를 지금 그와 가장 가까웠던 대선 후보에게 다시 듣는다. "성장만을 외치며 달려오는 동안 특권과 부패, 독선과 아집, 갈등과 반목만이 만연됐다." 이런 태도는 역사의식의 천박함을 넘어 근대화 세력의 성취를 통째로 부정하려는 당파성의 발로라는 점에서 더 나쁘다. 그것이 그들의 존재 방식이다. 그들은 한국 현대사의 성취는 보지 않고 성취의 어두운 그림자에만 시선을 고정한 채 끊임없이 침을 뱉는다. 그래서 딸에게 아버지 무덤에 침을 뱉으라는 그들의 요구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고 대선이 끝날 때까지 집요하게 이어질 것이다. 그때 딸은 과연 어떻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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