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구활의 고향의 맛] 게국지 사랑

게장에 묵은지 넣고 끓여…짭짤하면서도 감칠맛 돌아

경상도 사람들은 게장 맛을 잘 모른다. 게장뿐 아니라 민어, 서대, 낙지, 병어, 갑오징어도 잘 모른다. 어릴 적부터 만나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먹어보지 못한 것이다. 동해를 끼고 있는 경상도 사람들은 서해바다에 별로 가 본 적이 없다. 그곳에서 나는 생선들을 구경한 적도 없다.

기껏 안다는 게 왕소금에 깐깐하게 절인 간갈치와 간고등어 그리고 제상에 올리는 조기와 말린 가자미 정도와 안면을 트고 있을 뿐이다.

동해와 서해는 너무 멀다. 영'호남을 연결하는 88고속도로와 남해고속도로가 뚫린 지가 한참 되었지만 경상도 사람들이 호남 지역에 가 보지 못한 이들은 아직도 많다. 그러니 동해와 서해의 입맛이 다를 수밖에 없다. 입맛 하나만이라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관용해 줄 수 있다면 영'호남 화합도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닐 것 같다.

나는 경상도 내륙에서 태어났다. 외할머니가 동해 어느 포구 출신이어서 어릴 적부터 바닷가 이야기를 듣고 자랐다. "날씨가 흐린 날은 바닷가 게들이 집안으로 기어 들어와 우리 새끼 고추를 꽁 하고 깨물지" 하시면서 나의 고추를 꼬집기도 하셨다. 할머니의 이야기 속의 그 바다가 동경의 대상이었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바다에 가 본 적은 없었다.

호남과 충청도 사람들이 그렇게들 좋아하는 게장을 군에서 제대한 후 서울에서 처음 먹어 봤다. 같은 부대에 근무했던 ROTC 동기생을 만나 명동의 진고개식당이란 곳으로 갔다.

그는 호기롭게 게장 정식 2인분을 시켰다. 난생처음 고추장 양념이 범벅인 게장 정식을 먹어보니 별미 중의 별미였다. 메뉴판을 힐끔 쳐다보니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취직시험을 보러 잠시 서울에 와 있던 나의 근황을 듣고 합격하면 연락하란 인사치레의 말을 끝으로 우린 헤어졌다. 나는 연락하지 않았다. 합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서울 체류 3개월 만에 낮술에 대취해 대성통곡을 한 후 낙향했다. 완행열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실력을 원망했고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은 나의 게으름을 한탄했다. 그럴 적마다 진고개식당의 게장 정식이 눈에 어른거렸다. 시험에 합격하여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시작했더라면 '더러 게장 정식을 먹으러 갔을 텐데'라는 생각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다. 그날부터 게장은 꿈의 음식이 되고 말았다.

그 후 대구에서 사회에 첫발을 디딘 후 바쁘게 뛰어 다녔다. 그동안 여러 회식자리에서 온갖 요리를 먹어 봤지만 생각의 망막 속에 남아 있는 진고개 게장 맛은 어디에도 없었다. 대구 사람들은 서해에서 나는 알이 꽉 찬 싱싱한 꽃게를 구할 수가 없었고 설령 구한다 해도 담그는 비법을 전수받지 못해 짝퉁 게장일 수밖에 없었다. 그날 먹었던 그 게장 맛은 잃어버린 사랑처럼 짠한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뿐이었다.

역마살을 타고났는지 어릴 적부터 나돌아다니는 걸 좋아했다. 대학에 들어가선 산악부에 들어가 공부보다 산을 더 열심히 다녔다. 시간이 있고 호주머니에 돈이 좀 있으면 배낭 하나 둘러메고 무작정 떠나기를 좋아했다. 은퇴를 한 후엔 문화관광부가 주관하는 문화유산답사 전문강사 양성 코스에 들어가 우리나라 전역의 유산들을 찾아다녔다.

요즘도 맘에 맞는 친구와 합의만 되면 다음 날 새벽에 떠나는 걸 원칙으로 하고 있다. 그동안 동해'서해'남해의 이름난 섬과 바닷가를 얼추 돌아다녔지만 아직 안 가 본 곳이 더 많고 못 먹어 본 음식들도 숱하다, 그림자 밟고 다닐 힘만 남아 있으면 열심히 떠날 작정이다. 떠돌다가 떠돌다가 떠돌이 인생에 힘이 부치면 그때 손을 놓으리라.

저지난해인가 서해의 당진 서산 태안 쪽을 돌아다니다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바닷가 선술집에 들른 적이 있다. 그날 따라 영혼이 컬컬하여 "술 한 잔 주슈"했더니 주모가 플라스틱 막걸리 병에 들어 있는 것을 찌그러진 주전자에 철철 넘치도록 담아 주었다. 그러면서 술국도 아니고 찌개도 아닌 '게국지'란 걸 한 사발 퍼다 주었다. "이거 잡숴 봐, 능쟁이 게장에 묵은지를 넣고 끓인거야."

게국지는 짭짤하면서도 감칠맛이 도는 게 맛이 희한했다. 게장 정식이 음식의 첫사랑이라면 게국지는 첫 여인을 떠나보낸 후에 만난 두 번째 사랑 같았다. 첫사랑의 여인 미스 게장도 만나고 싶고, 두 번째인 미세스 게국지도 다시 한 번 만나고 싶다.

수필가 9hwal@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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