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군부가 제일 먼저 내세웠던 것은 사회에 만연한 부정부패를 척결하겠다는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일순위로 꼽았던 것은 군대 내에 비리를 일소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역사적 군사 쿠데타가 그렇듯이 그 어떠한 대의명분도 국민의 동의를 구하지 않은 것이기에 정당성을 획득할 수 없음은 자명한 일이었다. 1960년대 초까지 아버지는 말단 군무원이었다. 어머니 말씀에 따르면 아버지는 단 하루도 제시간에 집으로 들어오는 일이 없었다고 한다. 퇴근 시간, 부대 밖에서 빼돌린 PX 물품을 기다리는 장사꾼들과 밤이 새도록 술을 마시고 들어와 어머니에게 술주정을 부리곤 했다. 아버지에게는 자신이 떠받드는 상관들과 자신을 떠받드는 인간관계가 중요했을 뿐 집안 살림살이의 궁색함은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 잘난 가부장적 권위는 지금도 어머니의 몸에 깊은 상처로 남아 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걸음마도 떼기 전에 연락도 없이 집을 떠났다. 헌병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집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 있었다. 어머니는 누나들을 외가에 맡기고 아들 하나만을 끌어안고 남의 집 살이를 시작해야만 했었다. 36년이 지나 아버지를 처음 만났을 때, 아버지는 "나는 피라미였어" 라고 말했다. 술값이나 얻어먹은 것이 전부였는데 자신만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푸념이었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한 아들을 향한 궁색한 변명이었다. 누나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지만 아들은 울지 않았다. 세상에 대한 절망으로 정신을 놓아버린 어머니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살아계시는 내내, 어머니를 만나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는 오래전에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있었다.
비가 오면 생각나는 그 사람/ 언제나 말이 없던 그 사람/ 사랑에 괴로움을 몰래 감추고/ 떠난 사람 못 잊어서 울던 그 사람/ 그 어느 날 차 안에서 내게 물었지/ 세상에서 제일 슬픈 게 뭐냐고/ 사랑보다 더 슬픈 건 정이라며/ 고개를 떨구던 그때 그 사람/(중략)/ 외로운 내 가슴에 살며시 다가와서/ 언제라도 감싸주던 다정했던 사람/ 그러니까 미워하면 안 되겠지/ 다시는 생각해서도 안 되겠지/ 철없이 사랑인 줄 알았었네/ 이제는 잊어야 할 그때 그 사람/ 이제는 잊어야 할 그때 그 사람(심수봉 그때 그 사람 전문)
1977년, 10월 유신이 막바지로 치달을 무렵, 군사정권은 대학생들의 민주화 요구를 폭력으로 막는 것에 한계를 느낀다. 해서 문화적 회유책으로 대학가요제를 개최하게 된다. 당시 대학생들이 모이는 것 자체를 두려워했던 정권으로서는 획기적인 사고의 전환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이 조치는 많은 효과를 보았다. 문화적 공간의 부족에 시달렸던 젊은이들은 열광했고 이후 가요제 출신의 가수들이 대중 음악계를 평정하게 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그때 그 사람'은 제2회 대학가요제에서 심수봉(본명 심민경)이 직접 작사 작곡하고 부른 노래다. 당시 명지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심수봉은 대학생들의 정서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트로트 곡으로 참가했었다. 결국 가수로서 실력을 인정받긴 했지만 가요제의 취지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상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그녀는 운명처럼 이 곡을 평생 가지고 가게 된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연회에 초대받은 심수봉은 자신의 눈앞에서 최고 권력자가 권력 암투 속에서 죽게 되는 현장을 목격한다. 그리고 단지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당하고 남편이 안기부로 끌려가 고문을 당하는 수난을 겪게 된다. 과연 그녀에게 '그때 그 사람'은 어떤 의미였을까? 일본군 장교 출신으로 유난히 엔카(演歌'일본의 대중가요)를 좋아했다는 그때 그 사람이 다시금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어떤 이들은 그가 행한 독재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노라고 정당화한다. 절대적 빈곤의 퇴치가 그의 업적이라면 그로 인한 상대적 빈곤과 사회적 불평등의 양극화는 누구의 책임일까? 아버지는 임종의 순간까지 어머니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만든 이들에게는 오히려 그렇게 관대했지만 자신이 버리고 간 아내를 마지막 순간까지도 철저히 외면하셨다. 죽은 자는 말이 없다. 그러나 그에 대한 평가는 누구의 몫인가?
전태흥 (주)미래티앤씨 대표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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