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이동희의 동양고전 이야기]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덕성

'중용'(中庸)이란?

'지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는 것'을 우리는 '중용'이라고 한다. '사서'(四書) 중에 '중용'이란 책이 말하는 '중용'이 그런 뜻이다.(주자는 중과 용을 각각 설명했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중용'은 '알맞다'는 황금척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 내면의 '덕성'을 말한다. '덕성'은 모든 사람들의 '인간 본질'이면서 '나'라는 '자아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중용'은 첫머리에 "하늘이 인간에게 천부적으로 부여한 것이 본성이고, 여기 따르는 것이 도(인간의 길)이고, 그 방법이 가르침(교육)이다"라고 말한다. 인간다움의 근거는 '하늘'에 있다는 말인데, 매우 중요한 발언이다. 고대 인간의 지적수준에서는 그렇게밖에 볼 수 없었다.

기독교가 초월적으로 신을 창조주로 상정한 것과 유사한 발상이다. 신에게 경배하듯이 유교 역시 이 '본성'을 따르는 것(잘 발휘하는 것)이 인간의 길이고, 구체적 방법을 규범화하고, 제도화한 것이 교육이다. 그러므로 '중용'은 유교의 핵심교리인데, 인간은 현세에 살면서 인간의 길(윤리)를 밟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불교나 도가의 초현세주의에 대한 유교의 현세주의 입장이고, 주자가 이 책을 중요시한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 다음 '중용'이 가르치는 바는 '본성을 따르기' 위한 마음의 '수양법'을 제시하고 있는 점이다. "희로애락 감정이 아직 싹 트지 않은 고요한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감정이 적절히 표현될 때 그것을 '화'(和)라고 한다. 이 '중화'에 이르면 남에게, 나아가 만물에까지도 좋은 영향을 미쳐 천지가 바로 서고 만물이 길러진다"라고 말한다.

뒤의 그 공효는 조금 과장되었지만, 여하튼 마음의 평정과 감정의 컨트롤이 이 세상 속에 살면서 도덕을 성취하기 위한 수양방법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내용 이외 여러 문헌에서 뽑은 뒷부분은 부연 설명이다. 나의 덕성의 근원이 하늘에 있고, 이것을 잘 발휘해야 함을 깨닫고, 구체적으로 심리적 안정과 적절한 감정 표현을 위해 노력한다면 남은 물론, 만물과 이 우주와 합일되는 느낌(도덕적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반드시 그래야만 현세에서 속되지 않고, 하늘을 공경하면서도 추상 세계(현세를 떠남)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과거 농업사회에서 자연은 위대하게 생각됐다. 그리하여 하늘은 우리를 속이지 않고, 자연 섭리는 위대하다고 보았다. 이것이 '성'(誠)이다. 인간도 이것을 본받아야 된다. '중용'은 유교의 교리이고, 그 첫장은 주문처럼 외울 만하다. 다산 정약용 형제는 이것을 매개로 유일신론 천주교에 귀의했다. 그러나 오늘날 초월신론, 범신론, 범재신론, 모두 종교로서의 우열이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또 종교적 진리 보다 과학적 진리가 앞서는 현실을 무시할 수 없다. 그러면 '중용'을 다시 봐야 되지 않을까?

이동희 계명대 윤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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