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외래어 간판 홍수 속, 눈에 확 꽂히는 그 이름 '우리말 스타일'

알파벳보다 낫다, 한글의 재발견

순 한글 이름에 디자인도 한글의 내음을 물씬 풍기는
순 한글 이름에 디자인도 한글의 내음을 물씬 풍기는 '들메꽃 찻집'의 간판. 성일권기자 sungig@msnet.co.kr
대구은행이 사투리
대구은행이 사투리 '단디'(확실히)를 브랜드 이름으로 정해 내놓은 금융카드
대구 지역에 기반을 둔 순 한글 이름 프랜차이즈 브랜드인
대구 지역에 기반을 둔 순 한글 이름 프랜차이즈 브랜드인 '떡보의 하루

버젓한 모국어(한글)가 있는 나라에서 외래어(외국어 포함)가 아닌 고유어(우리말에 본디부터 있던 말이나 그것에 바탕을 두고 새로 만들어진 말로 외국에서 빌려 온 흔적을 찾을 수 없는 말)의 흔적이 담긴 간판을 찾겠다며 하루 종일 길거리를 헤맨 것은 어찌 보면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이 기사의 취재 과정이 그랬다. 홍수 같은 외래어 간판들 속에서 순 한글 간판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최근 한글을 세련되고 맛깔스럽게 표현한 간판이 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각종 기업과 제품 브랜드(상표)도 마찬가지다. 땅 밑에서 점점 얼굴을 찡그리던 세종대왕이 조금씩 미소를 되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 다음주인 10월 9일은 566번째 한글날이다.

◆한글보다 알파벳이 더 많은 동성로

이달 4일 대구 동성로를 찾았다. 이곳 길 양 옆은 우리나라에서 내로라하는 패션'외식 프랜차이즈'전자제품 등의 브랜드 간판으로 가득하다. 평소엔 몰랐는데 취재를 위해 유심히 살펴보니 속된 말로 '꼬부랑말' 천국이었다.

대부분 영어로 적혀 있었는데 일부 간판은 한글 이름이 함께 표기돼 있지 않았다. 이런 경우 아직 영어를 배우지 못한 아이들은 식별이 어려울 수 있다. 기자도 정확한 발음을 모르다가 최근에야 제대로 읽을 수 있게 된 간판이 몇 개 있다. 이전까지는 간판을 그저 '그림'이나 '기호'로만 인식했던 것.

동성로 카페 골목은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최근 파스타 등을 파는 이탈리아 음식점과 유럽풍 카페가 창업 붐을 이루면서 새로 내건 간판 역시 이탈리아'프랑스'스페인 등 유럽식 외래어를 다양한 영어 필체로 새긴 것들로 가득했다.

동성로엔 '가나다라'보다 'ABCD'가 더 많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한글로 '맛'내는 음식점들

그래도 구석구석 찾아보면 한글의 '맛'을 내는 간판이 우리 지역에 꽤 있다. 음식점이 많다.

대구 달서구 두류동에 있는 '들메꽃 찻집'은 순 한글을 사용한 것은 물론 간판 디자인까지 한글의 내음을 물씬 풍긴다. 주인 윤명이(54'여) 씨는 "10년 전 찻집 문을 열 때 가게 이름을 정하지 못해 고민했다. 그럴듯한 외래어도 생각했다. 그러다 알고 지내던 한 신부님이 이름을 지어 주셨다. 처음엔 다소 촌스럽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굉장히 아름답고 세련된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손님들의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고 말했다.

재치 넘치는 한글 표현을 담은 가게 이름도 있다. '기분좋은 중독'은 카페인이 담긴 커피를 파는 카페 이름이다. '나비도 꽃이었다'는 과거와 현재가 섞인 운명을 읽어 주는 사주카페 이름이고, '도심속의 산골'은 정말로 도심 한가운데서 산골 음식을 파는 음식점이다. '즐겨찾기'라는 오징어 횟집도 있다. 매일 싱싱한 산지 직송 오징어를 준비해 놓고 있으니 자주 찾아달라는 얘기다.

한글의 특색은 다양한 의태어와 의성어다. 이를 그대로 간판에 담은 가게도 많다. '지글지글 보글보글'은 끓는 소리 그대로 표현한 떡볶이 전문점 이름이다. '반짝반짝 빛나는'은 맛은 물론 보기에도 예쁜 타르트를 파는 가게 이름. '꼴깍'은 정말로 술맛 다시게 만드는 술집 이름이다.

◆영화 제목부터 대구 사투리까지

인기를 얻은 대중문화도 각종 가게 이름에 영향을 준다. '돼지가 골목으로 간 까닭은'(고깃집)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의, '꼬추를 품은 닭'(닭요리 전문점)은 드라마 '해를 품은 달'(2012)의 패러디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카페)은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 수록된 게송(불교적 교리를 담은 시)의 한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경전에 대한 강론을 담은 법정 스님의 저서가 대중적으로 인기를 얻었는데 그 제목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2002)이다.

몇 년 전부터 간판에 공통적으로 새기기 시작한 어휘도 발견할 수 있다. 남자 요리사를 전면에 배치하는 음식점이 유행하면서 '남자' 시리즈 간판이 늘었다. '밥하는 남자'나 '고기굽는 남자' 등이다. '사람들'도 대표적이다.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래연습실), '아름다운 사람들'(미용 강습 학원), '김밥 파는 사람들'(분식 프랜차이즈) 등이다.

순 한글 표현을 넘어 대구 사투리를 새긴 간판도 적잖게 찾을 수 있다. 대구 남구 대명동에 있는 '맛좋은교'(복어요리 전문점)는 무려 20여 년 전에 지어진 이름이다. 당시 고유어는커녕 사투리를 간판에 활자로 새긴다는 것은 점잖은 지역사회 분위기에 쉽지 않았던 일. 주인 진현수(54) 씨는 "엉뚱하지만 재밌을 것 같아 지어본 이름"이라고 말했다. 음식점은 손님에게 맛으로 평가받아야 하는데 "맛있으셨나요?"라고 묻기보다는 대구식으로 "맛있는교?"라며 푸근하게 소통하겠다는 것.

한 생활포털사이트에서 중소 자영업자 508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89%가 순 한글 간판에 대해 긍정적인 인식을 가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유로는 '외래어 간판이 많아서 오히려 눈에 띈다''외래어 간판에 비해 친근감을 준다''아름다운 한글로 고객의 감성을 자극할 수 있다' 등을 꼽았다.

◆치료에 치유(힐링) 더하는 병원 이름

한글 표현이 특히 두드러진 분야가 병원 이름이다. 대구 중구 삼덕동에 있는 '분홍빛으로 병원'은 유방암을 전문으로 진료한다. 영어로 '핑크리본'은 유방암을 상징한다. 유방암으로 죽은 언니를 기리며 유방암 퇴치 운동에 평생 앞장섰던 유방암 퇴치 재단 '코멘'의 설립자 낸시 브링커의 에세이 제목에서 유래한 단어다. 이를 우리말 표현으로 순화한 것이다. 이 병원 이동석 원장은 "병원에서는 단순 치료가 아닌 아픈 분홍(유방암)을 사랑스런 분홍(건강하고 아름다운 여성)으로 바꿔주는 일을 한다. 예를 들면 병원 내에 힐링센터를 설치해 웃음치료나 미술치료 등 전문가들이 자원봉사로 환자들의 정신적 재활을 돕고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신체적 치료에 정신적 치유의 의미도 담은 병원 이름이 우리 지역에 적잖다. 그러면서 진료 과목도 재치 있게 표현한다. 자연스레 임플란트 시술 등을 떠올리게 만드는 '행복을 심는 치과', 백내장 수술 등을 통한 개안(開眼)을 개화(開花)로 은유한 '난초꽃피다 안과', 환자에게 '난 소중해'라고 되뇌게 만드는 '참 소중한 당신 정신과' 등이다. 물론 '속 시원한 내과''다 나을 외과''아름다운 피부과'처럼 전통적인 직설 화법의 이름도 꾸준한 인기를 얻고 있다.

◆기업과 제품 브랜드도 순 한글 바람

기업과 제품 브랜드도 순 한글 바람을 타고 있다. 일반 가게 이름에 비해 브랜드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에게 소구된다. 그래서 기업은 마케팅 차원에서 신중하게 브랜드 이름을 짓는다. 그만큼 한글 이름도 '잘 팔리는' 시대가 됐다는 얘기다.

1997년만 해도 증권거래소의 774개 상장법인 중 순 한글 이름을 사용하는 기업은 오뚜기와 빙그레 단 2곳뿐이었다. 나머지 기업은 외래어와 한자를 섞어 썼다. 제품 브랜드도 '맛동산' 등 아이들을 위한 과자 이름이나 '아리랑''시나브로''하나로'와 같은 담배 이름 등 일부에만 순 한글을 사용했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여러 기업이 순 한글 이름을 사용하고, 다양한 제품 브랜드에 순 한글 이름을 적용하고 있다. 컨설팅 전문업체인 브랜드메이저가 지난해 전국 남녀 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선호하는 한글 브랜드로 '풀무원'(식품), '푸르지오'(아파트), '딤채'(가전제품), '디딤돌'(교육출판), '다음'(온라인서비스) 등 다양한 분야의 브랜드가 뽑혔다.

특허청에 따르면 순 한글 브랜드 출원이 잦은 업종은 요식업과 농축산업 분야다. 대부분 먹거리 제품과 관련됐는데 신토불이 의식이나 국산 선호 등의 소비자 성향과 맞아떨어진다는 것.

우리 지역에 기반을 둔 기업이 내놓은 브랜드도 순 한글이 적잖다. 대구은행은 2008년 부산은행, 경남은행과 함께 '확실히'라는 뜻의 사투리인 '단디'를 브랜드 이름으로 하는 금융카드를 발매했다. '떡보의 하루'(전통떡 프랜차이즈)와 '남다른 감자탕'(건강보양식 프랜차이즈)도 우리 지역에서 출발한 순 한글 브랜드다.

황희진기자 hhj@msne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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