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박현수의 시와 함께] 우물 밖 동네

★ 우물 밖 동네 -김명인

예전의 우물은 마을의 중심이어서

동네마다 공론이 샘솟는 우물 하나쯤은 갖춰놓았다

누구든지 말은 풀고 소문은 긷고

수다가 지나쳐 이끼가 피면

손 없는 날을 받아 두레로 청소했었지

우물 밖 동네란 지지리도 가난했지만

제 양껏 기갈을 채워도 찡그리지 않는 물낯이 있어

하늘을 축이며 구름도 어루만지며

우물은, 세월과 함께 느리게 혹은 빠르게 늙어갔었지

이제 누구도 그 전설에서는 물 긷지 않아서

허공 혼자 어루만지다 가는 저만의 얼룩,

이야길 길어 올리려 두레박을 내린 것도 아닌데

이 우물, 너무 메말라서 수면조차 없네

들여다보면 캄캄하게 웅웅거려 더욱 골똘해진 그리움,

별똥별 떨어져 표시하는 예전의 우물 자리에 서서

물 긷던 사람들의 아득한 별자리 헤아려본다

사라진 동네에 우물이 하나, 지금은

흔적조차 지워져버린

저 오랜 가난 깨우지 마라,

사무친 전설들 뼛속 깊이 저며 올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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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은 낡고 오래된 것들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내곤 합니다. 낡고 오래된 만큼 이야기도 많은 까닭입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시선이 새롭지 않다면 고리타분한 옛날이야기가 되어버리니, 이런 소재일수록 다루기가 쉽지 않습니다.

사라진 동네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메마른 우물을 그리고 있는 이 시는 우물이 마을 공론의 중심이 되었던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습니다. '말은 풀고 소문은 긷고' 하던 전설 같은 시절에 대한 그리움에는 낡은 만큼 새로운 시선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박현수<시인·경북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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