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하늘에선 달이 걷고, 땅 위에선 내가 걷고

한가위 큰 잔치가 끝났습니다. 지난 연휴 동안, 너나없이 주차장이 된 도로 위의 움직이지 않는 자동차 속에 스스로 갇히면서도 필사적으로 고향을 찾아 헤매었지요. 이제 모두 제자리로 돌아가 일상과 마주할 시간입니다.

제게 이번 추석의 고향 나들이는 그 감회가 남달랐습니다. 42년간 매달렸던 교직에서 물러난 뒤 처음 찾는 고향이라, 마치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낙향하는 옛 선비의 마음이었을 뿐 아니라, 늘 타관을 떠돌며 배움의 길을 헤매는 아들이 멀리 미국에서 건너와 함께한 여정이었으니까요. 어느덧 장성해버린 아들에게 운전대를 맡기고 운전석 옆자리로 물러나 앉아 차창 풍경을 헤아리는데, 왜 자꾸 지나가버린 세월만 아련하게 스쳐 오던지요.

의성군 비안면 자락리. 낯익은 동구에 들어서면서 차에서 내렸습니다. 초등학교를 다닐 때 책보자기를 어깨에 둘러메고 뛰어다니던 그 길 위에 서니, 먼저 길섶의 땅버들가지와 귀에 익은 냇물 소리가, 질경이가, 강아지풀들이 앞다투어 매달렸습니다. "정말 그렇게 잊고도 지낼 수 있니? 우리가 보고 싶지도 않았니?" 하며 코흘리개 친구들처럼 어깨동무를 해왔습니다. 소 꼴망태를 메고 다니던 논둑길로, 산기슭의 오리나무, 상수리나무, 갈참나무 등도 모두 달려와 "그래, 정말 반갑다. 그간, 어떻게 지냈니?" 하며 나를 에워싸 반겼습니다. 마을 뒷산도 일어나 앉아 풀냄새 그윽한 그늘을 펼쳐 포근히 안아주었습니다.

고향집 안마당에 고인 세월의 그림자는 무릎까지 빠질 만큼 깊고도 깊었습니다. 그 옛날, 초가지붕 타고 내려와 쌓이는 산그늘을 부지깽이로 휘저으며 저녁 소죽을 끓이는 아궁이에 검불은 타닥타닥 불똥 튀기는 햇살로 되살아나고, 불꽃 사위면 더욱 진한 어둠에 빠져들던 유년(幼年)의 안마당, 성큼 다가서는 서산 숲에서 귀신처럼 실눈 뜨고 소쩌앙 소쩌앙 울어대는 손톱달이 묵은 묘지 위로 물구나무 서 갈 때, 나뭇짐 지고 삽짝을 들어서는 아버지의 헛기침 소리에 내 손목 탈치고 손톱달 깜짝 숨어버리는 숲에서 먹물처럼 번져오던 어둠, 어둠, 그 푸근한 어둠 속으로 아버지를 따라 들어서던 해빙의 들판과 들바람, 시린 물소리, 왁자지껄 안마당에 쏟아지던 별들 별들, 그 빛나던 소유(所有), 아~ 그건 정말 꿈이었을까요.

성묫길은 또 얼마나 눈에 익고도 낯설었는지요. 무성한 풀과 관목들이 스크럼을 짜고 가로막아 자꾸만 끊어지는 산길을 겨우겨우 이어가며 도착한 조상님들의 음택(陰宅). 일일이 방문하여 인사를 드리고 땀을 닦으며 나무 그늘에 들어섰을 때, 먼 산등성이 하늘가로 구름이 한가롭고, 은성한 풀벌레 소리 사이로 서늘한 바람이 문득, 문득 날아들었습니다. 저 무심하고도 허허로운 바람 소리. 그 바람 자락을 타고, 아득한 옛날 제가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 꿀밤 추수에 나선 할머니 손에 이끌려 와서 할아버지 산소 앞에 앉아 나누던 말들이 생생하게 흘러나왔습니다.

-할매야, 할매가 어릴 적에도 여기는 산이었나?/ -하문, 산이었제./ -소나무에 바람도 저래 불었나?/ -그라문, 바람은 천년만년도 더 사는데/ -여기 할부지는 우리가 온 걸 아실까?/ -알제, 알고말고. 이놈 손주 왔구나 하는 하래비 말소리 니는 못 들었나?/ -못 들었다. 땅속에서 우예 말하노?/ -나뭇가지 흔들어 바람 소리로 말하제. 풀벌레 새소리로도 말하고 하늘에 구름 띄워 손짓도 하고/ -무섭다. 내려가자 할매야!/ -무섭긴. 난도 니 하래비 옆에 누워 니 놈 내리다 보며 살낀데./ -정말로?/ -공부 잘하는가 볼 끼고, 커서 어떤 각시 만나 사는가 볼 낀데./ -싫다! 빨리 내리 가자 할매야./ -응야, 이 녀석아./ -할매야, 사람은 죽어서도 정말 이 세상을 다 볼 수 있나?/ -낄낄낄… 이 세상 저 세상이 문 하나 사인데 우째 안 보이겠노? 우째 안 들리겠노?

저 일렁이는 나무그늘들이 차마 닫아걸지 못한 마음의 문짝들은 아닐는지.

해 질 녘, 자꾸만 옷자락을 붙잡는 고향 산천을 빠져나와 대구로 향했습니다. 호기롭게 속도를 내던 차가 도리원에서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이내 제자리걸음이었습니다. 그러나 길이 꽉 막혀 차가 꼼짝하지 않아도 답답하기는커녕 마음이 새털처럼 가벼웠습니다. 아마도 이번에 찾은 고향 산천이 제게는, 연암(燕巖) 선생이 열하일기에서 말한 호곡장(好哭場)이었던가 봅니다. 그윽한 산천경개를 두고 '훌륭한 울음터'라고 했다던. 그간 객지를 떠돌며 마음 놓고 울 곳조차 찾지 못해 억지로 메고 다녔던, 제 남루한 눈물 자루를 고향 산천이 기꺼이 받아내려 말끔히 비워주었기 때문이겠지요.

어느새 보름달이 둥실 떠올라 차창 너머로 손짓해 왔습니다. 강아지처럼 하늘에서 졸졸 따라오는 보름달을 데리고 천천히 걸었습니다. 고향집 마당을 지키던 늙은 감나무도 꾸부정하게 허리를 굽힌 채 천천히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김동국/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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