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 70년대까지 가축은 축산 생산품이 아니라 그야말로 '집에서 기르는 짐승'이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에게는 소 먹이는 일이 일상이었고, 겨울이면 집집마다 김이 무럭무럭 오르는 쇠죽을 끓여 먹였다. 암탉은 마당에서 병아리를 데리고 먹이를 찾아다녔고, 아이들은 아침에 돼지죽을 준 뒤에야 학교로 출발할 수 있었다. 쇠죽 끓일 생각은 않고 '밥 타령'을 했다가는 혼이 나던 시절이었다.
당시 농촌 사람들에게 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그날 마을에서 소나 돼지를 잡았음을 의미했다. 그러니까 30, 40여 년 전 밥상에 고깃국이 오른다는 것은 내가 아는 혹은 우리 동네에서 키우던 돼지나 소가 이제는 세상에서 없어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 돼지나 소를 잡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수고했다는 사실을 의미했다. 고기든 채소든 그것이 밥상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을 늘 생각했다는 말이다.
현대인들은 식탁 위의 통닭에서, 쇠고기 스테이크에서, 석쇠 위의 삼겹살에서 살아 있던 닭의 죽음, 풀을 뜯던 소의 평화, 돼지죽을 주던 누군가의 수고를 연상하지 않는다. 그 모든 과정은 멀어서 보이지 않게 되었고, 잊히기 시작했고, 결국에는 무(無)가 되었다.
게다가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더 많은 고기를 먹게 되면서, 식탁에 오르는 고기는 들판에서 풀을 뜯던 그 시절의 소가 아니고, 아이들이 아침마다 꿀꿀이죽을 날라 주던 돼지도 아니다. 소나 돼지, 닭은 세상에 나서 죽을 때까지 오직 살을 찌우기 위해, 알을 낳기 위해 좁은 공간에 갇혀 종일 먹는 존재로 전락했다. 가축의 삶에서도 우리가 알던 60, 70년대의 '풍경'은 사라진 것이다.
우리 삶에서 어떤 풍경과 과정이 사라지는 것이 비단 고기를 먹는 행위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더 짧은 시간에, 더 편리하게 요구하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가 소비하는 모든 혜택은 포장된 '상품'으로 정리되었다. 상품은 돈을 지불하고 구입하는 '권리'일 뿐 거기에 어떤 생명의 희생, 어떤 이의 수고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많이 먹고, 편하게 사는 대신 우리는 미안한 마음,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렸다. 풀을 뜯던 '가축'이 좁은 우리에 갇혀 지내는 '상품'이 되는 동안, 우리는 그 상품 구입을 위해 '돈만 벌면 되는 존재' '알만 낳는 닭'이 돼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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