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계셨더라면 지금쯤 백 세를 넘기셨을 친할머니가 노환으로 병원에 계실 때의 일이다. 수개월간의 병상 생활로 팔과 다리는 앙상해지고 기력은 점점 쇠하여져, 당신이 열심히 불공드려 서른 즈음에 어렵게 얻으셨다는 장남 목소리에도 영 반응이 신통치 않으시곤 했다. 그러던 즈음, 어린 증손자와 증손녀의 시끌벅적한 깜짝 방문으로 할머니 얼굴에 햇살처럼 미소가 번진다. "할머니, 얘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하며 증손녀의 얼굴을 가까이 대어 드리자, 마른 입술을 달싹여 한참만에 "갸아는…토깨이(토끼)" 하신다.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대답에, 이번엔 증손자를 급히 앞세우고 재촉하듯 다시 묻는다. "그럼, 할머니, 얘는 누구죠, 얘는?" 내가 그걸 모를 리 있느냐는 자신만만함이 비친 얼굴로 말씀하신다. "야아는…갱새이(강아지)!".
그 장면을 목격한 우리 가족은 증손주들에게 농담을 하실 만큼 기력이 저만치 회복되셨다는 것에 다들 안심하며 한참을 웃었다. 그러나 기뻐하는 가족들 뒤로 나는 '할머니가 그간 표현은 안 하셨지만, 우리도 저만치나 아끼셨겠구나'하는 생각에 코끝이 찡해졌다. 수십 년을 함께 살면서도 살가운 애정 표현이나 다정한 말을 별로 나눈 기억이라고는 없던 터라, 이러한 할머니의 농담 한마디는 평생 동안 마음에 담았던 핏줄에 대한 애정을 이제는 표출해도 되지 않겠느냐는 심정으로 비쳤다. 일백 년 가까이 누가 볼세라 감춰놓으신 할머니의 애정을 말이다.
경상도식 애정 표현은 유전자를 타고 대물림되나 보다. 게다가 그 유전인자는 지독한 우성인 것 같다. 엊그제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에서 "아버지한테 니는 안부 전화 좀 자주 해드려라. 네 전화 뜸하다고 서운해 하시더라"하는 어머니 말씀에, "아, 거 참, 아버진 딱히 하실 말씀도 없으신 것 같던데, 아무튼 알았어요"하며 툴툴거리다가 그날 밤 집으로 전화를 드린다. 아버지가 받으신다. "어, 어, 웬일이고, 그래, 별일은 없고? 어, 잠깐 기다려봐라, 네 엄마 바꿔주마"하며 몇 마디도 안 나눈 채 벌써 수화기를 넘기신다. 타지에 사는 딸의 전화를 몇 주간이나 기다렸다는 분이 맞는가 싶다.
어느 TV 프로그램에서 그랬던가, 여러 지역 중에서 경상도 사람들이 전화요금도 가장 적게 나온다고. 이처럼, 경상도식 애정 표현이 무뚝뚝한 게 흠이라 해도, 경상도 패밀리들은 선천적으로 행간의 애정을 읽어 내는 유전자도 함께 물려받는다. 그러기에 '특별히' 다정다감한 서울 '특별시'에 못지않게, 경상도 스타일의 애정 표현으로도 사람 사는 향기는 모락모락 피어나나 보다.
조자영<한국패션산업연구원 패션콘텐츠사업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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