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7일 오후 3시 40분, 구미소방서에 119 신고 전화가 들어왔다. 국가산업 4단지 화학공장 휴브글로벌에서 가스 폭발 사고가 났다는 것. 출동하는 소방관들은 그냥 LP가스가 폭발한 정도로 생각했다. 현장에 가서 뭔가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끼긴 했지만 그대로 투입됐다. 그런데 아뿔싸. 1차 진압에 투입됐다가 돌아온 대원들이 가스 폭발이 아니라 누출이며, 누출 가스가 심상치 않음을 알렸고 그제야 화학보호복이 부랴부랴 수송됐다.
그때까지도 불산이 얼마나 유해한 물질인지 현장에선 전혀 몰랐다. 적은 농도라도 지연성 폐 손상, 전신 독성 등의 합병증을 일으킬 수 있으며 체내에 들어오면 세포의 대사를 방해해 세포가 괴사되도록 한다는 엄청난 사실을 말이다.
꽤 유해한 가스 정도로 판단하고 화학보호복을 갖춘다고는 했지만 완전 무장을 한 사람은 불과 12명. 나머지 170여 명은 사실상 무방비 상태에서 현장에 투입됐다. 다음 날 언론 보도나 전문가들을 통해 불산이 질산과 함께 가장 유독한 가스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통을 호소하고 있다. 문제는 현 상태에서 얼마나 큰 신체 손상을 입었는지 확인이 잘 안 된다는 점이다. 이게 우리나라 소방의 현주소다.
비교적 잘 알려져 있는 소방관들의 열악한 장비 실태를 말하는 것은 당연히 장비 및 처우가 개선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지만 이보다 더한 이유가 또 있다. 재난 때 기자들 역시 얼마나 열악한 취재 환경에 노출돼 있는가를 말하기 위함이다.
사고 당일 가스 폭발 사고가 났다는 사실을 전해 들은 기자들은 현장으로 달려갔다. 소방관들이 몰랐으니 그들도 어떤 종류의 가스가 현장을 뒤덮었는지 알 턱이 없는 채로.
가스의 위험도를 파악한 소방관들의 진압 장비는 달라졌지만 기자들은 맨몸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기자들에게 불산이 위험하니 접근하지 말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기자들은 그 흔한 마스크조차 없는 상태에서 사태 파악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하기야 소방관들도 불산이 그렇게 위험한 줄 모르고 있었으니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을 게다.
설사 불산 가스의 위험 정도를 알았다고 해도 현장에 가지 않는 이상 달리 대처할 방도가 없기는 매한가지다. 재난상황에 대처하는 매뉴얼을 갖추고 있는 곳이 거의 없고, 취재 보호 장비도 전혀 없는 상태다. 각자가 자기 몸을 알아서 보호해야 하는 상황. 이런 결과 취재 현장을 누볐던 기자들 역시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신문사의 구미 담당 기자 역시 2차례나 병원에서 검진을 받은 후 3일치 칼슘약 처방을 받고는 오늘도 현장 상황을 전하고 있다. 독자들에게 진실을 전달하는 것이 우선이지 자신에게 어떤 위험이 닥쳐오고 있는지는 차후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기자들의 재난 상황 보도 때 안전 시스템 미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해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폭발 지역을 취재하러 한국에서 현지에 들어간 기자 가운데 30명 이상이 방사능에 피폭됐다는 보고도 있다. 모 언론사 취재진 8명은 염색체 변형 진단을 받기까지 했다.
사건 사고가 발생하면 기자들은 반드시 현장으로 가야 한다. 생생하면서도 진실된 정보를 전달해야 하는 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정부가 먼저 개입하면 유리하게 가공을 하려 한다. 왜곡된 정보가 전달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이번 구미 가스 누출 사고에서도 만약 기자들이 불산에 노출될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현장에 가지 않고 정부나 지방자치단체의 설명만 듣고 보도했다면 피해 규모는 엄청나게 축소됐을 개연성이 크다. 오염 정도가 기준치 이하라는 설명을 듣고 집으로 돌아간 주민들이 고통을 호소하고, 가축들이 비실거리며, 농작물이 누렇게 변해버리는 상황을 지역 언론이 실시간으로 전했기 때문에 결국은 대통령까지 대책 마련을 지시하고 나선 것이다.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하는 소방관들에 대한 다각적 지원은 백번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국민들의 알권리 충족을 위해 노력하는 기자들 역시 국가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 정부와 지자체는 재난 상황에서 정확한 정보를 언론과 공유하고 최소한의 취재 보호 장비를 지원하는 것이 맞다. 재난 때 맨몸으로 나가야 하는 우리는 열악하지만 최소한의 장비라도 갖고 있는 소방관들이 오히려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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