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가 뜨거워야 할 젊은이의 몸에서 피는 식었습니다.
그리고 두 눈에는 흥건한 눈물이 괴어 있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젊은이의 마음은 낙망과 설움으로 가득 차 있고, 온몸에는 병도 깊었군요. 이런 몸으로 과연 어디를 어떻게 여행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가수 강석연이 불렀던 노래 '방랑가'의 한 대목은 차디찬 북국 눈보라 퍼붓는 광막한 벌판을 혼자 의지가지없이 떠나갑니다. 이 노래 가사에 담겨 있는 내용은 그야말로 비극적 세계관의 절정입니다. 그 어떤 곳에서도 희망의 싹을 찾아볼 길이 없습니다. 실제로 1920년대 초반 당시 우리 민족의 마음속 풍경은 이 '방랑가'의 극단적 측면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좌절과 낙담 속에서 우리는 기어이 1919년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펼쳤고, 죽음을 무릅쓴 채 불렀던 만세소리는 한반도 전역에 울려 퍼졌습니다. 그러나 이도 잠시 우리의 주권회복 운동은 잔인무도한 일본 군경의 총칼에 진압이 되고 말았지요. 그 후의 처절 참담한 심경은 말로 형언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1920년대의 시 작품도 몽롱함, 까닭 모를 슬픔, 허무와 퇴폐성 따위의 국적을 알 수 없는 부정적 기류가 들어와 대부분의 식민지 지식인들은 그 독한 마약과도 같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그런데 1931년 이런 시대적 분위기를 잘 담아낸 노래 한 편이 발표되어 식민지 청년들의 울분과 애환을 대변해 주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방랑가'였습니다. 한 잔 술에 취하여 이 노래를 부르면 그나마 답답하던 숨통이 조금이나마 트이는 듯했습니다. 줄곧 명치끝을 조여오던 해묵은 체증 같은 것이 다소나마 씻겨 내려가는 듯했습니다.
피식은 젊은이 눈물에 젖어/ 낙망과 설음에 병든 몸으로/ 북국한설 오로라로 끝없이 가는/ 애달픈 이내 가슴 뉘가 알거나
돋는 달 지는 해 바라보면서/ 산 곱고 물 맑은 고향 그리며/ 외로운 나그네 홀로 눈물 지울 새/ 방랑의 하루해도 저물어가네
춘풍추우 덧없이 가는 세월/ 그동안 나의 마음 늙어 가고요/ 가약 굳은 내 사랑도 시들었으니/ 몸도 늙어 맘도 늙어 절로 시드네
식민지 시절에는 이처럼 방랑과 유랑의 테마를 다룬 노래들이 참 많이도 나왔습니다. 그 출현의 배경에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원하지도 않았던 방랑과 유랑으로 등을 떠밀어 내보낸 당사자, 즉 제국주의 일본에 대한 간접적 저항의 표시가 들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러한 유랑과 방랑의 노래 속에는 가족들과 평화스럽게 살아오던 고향을 버리고 쫓기듯 만주나 시베리아로 떠나가서 어처구니없는 고통과 좌절을 겪고 있다는 비탄과 애환이 하나의 고발적 화법으로 제시되어 있었습니다.
1920년대 중후반, 당시 식민지 조선의 문단에서 활동하던 진보적 문학인들의 그룹인 카프(KAPF)의 멤버들은 벗들과 한 잔 술에 취하게 되었을 때 어김없이 이 노래를 합창으로 불렀고, 부르다가 기어이 통곡으로 자리를 마감했다고 합니다. 당시의 그런 분위기를 떠올리면서 오늘은 이 노래를 여러분과 함께 나직하게 불러보려고 합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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