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찾아다니면서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던 것을 새로 알게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논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진주 남강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文助)를 끌어안고 순국한 사실은 이미 알려진 이야기지만 그녀의 성이 주(朱) 씨며, 진주 사람이 아니고 전북 장수(長水) 출신이며, 기생(妓生)이 아니라 같은 시기에 진주성에서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한 화순 출신의 의병장이자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지낸 일휴당 최경회(崔慶會'1532~1593)의 부실(副室'첩)이었다는 것을 새로 알게 되었다.
전라북도 장수군청 앞마당에는 논개가 심은 의암송(義巖松'천연기념물 제397호)과 젊은 시절 이곳에서 현감을 지낸 최경회가 심었다는 큰 은행나무가 있다.
그녀는 장수군 장계면 주촌리에서 주달문과 밀양 박씨 사이에 무남독녀로 1574년(선조 7) 태어났다. 아버지가 일찍 죽어 가세가 기울자 삼촌이 돈 많은 이웃 마을 김풍헌의 불구자 아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어머니 박 씨는 논개를 데리고 친정이 있는 경상도로 도망을 갔다. 돈을 날리게 된 김풍헌은 관가에 고발하게 되고 잡혀온 모녀는 당시 장수 현감이었던 최경회로부터 문초를 받았으나 본인들이 저지른 죄가 아니고 삼촌의 짓이기 때문에 무죄로 풀려나게 된다. 그러나 죄는 벗었지만 갈 곳이 없었다.
처지를 딱하게 여긴 최 현감의 주선으로 모녀는 관아 일을 돌보는 종이 되었다. 이때가 논개 나이 6세 때였다. 이 일이 인연이 되어 오갈 데 없는 그들은 최경회가 임지를 옮길 때마다 데리고 다녔다. 본디 성실해 선정을 펼친 최 현감은 담양부사로 영전하게 되었다. 이때 논개는 17세 꽃다운 처녀였다.
공교롭게도 늘 몸이 불편했던 부인이 논개를 부실로 추천하니 마침내 최 부사(府使)에게 몸과 마음을 다 바쳐 수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1590년(선조 23) 최 부사의 모친이 별세한다. 효행이 깊었던 최 부사는 시묘(侍墓)를 위해 논개를 고향으로 돌려보낸다. 그해가 1591년 (선조 24) 전운이 감돌던 시기였다.
1592년 4월 드디어 왜란이 일어나고 미리 대비하지 못했던 조선은 옳게 싸워보지도 못하고 강토가 유린되었다. 이때 경상도에서는 곽재우 등이, 전라도에서는 고경명 등이 의병을 일으켰다. 최 부사는 상중에 있었고 건강마저 좋지 않아 싸움에 나가는 대신 장형 경운과 중형 경진과 더불어 고사정(지금의 화순읍 삼천리)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의병 300여 명을 모아 장조카 홍재에게 인솔시켜 친구 고경명 휘하로 보냈다.
그러나 고경명이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함께 활동하던 문홍헌이 달려와 지도자를 잃고 우왕좌왕하는 의병들을 이끌어 줄 것을 간청하자 장자와 차자 조카 등과 함께 기꺼이 동참해 그 해 8월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다. 남원을 거쳐 장수로 진출했다. 장수는 그가 15년여 전 현감으로 재직했던 곳이라 의병을 모으고 군량을 조달하기 쉬운 곳일 뿐 아니라, 전라도로 넘어오는 왜군을 막기 적합한 곳이었다.
그가 의병을 훈련시키던 월강평(月岡坪'사후 그를 기리는 월강사가 세워졌다)은 논개가 사는 주촌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이때 논개도 참가하여 의병들의 식사며 빨래 등 허드렛일을 거들었다. 부부의 연을 맺고 헤어진 후 첫 만남이었다. 공은 의병들을 이끌고 금산성, 무주 등에서 왜군들과 싸워 큰 전공을 세웠다.
이때 진주성이 위험하다며 지원을 요청해 왔다. 일부 의병들이 전라도를 지키는 것도 어려운데 진주까지 먼 길을 가서 지원할 필요가 있느냐고 항의했지만 '영남도 우리 땅'이라며 설득시켜 임란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크게 기여했다. 공의 전공이 경상도 관찰사 김성일에 의해 선조에게 보고되고 1593년(선조 26) '경상우도병마절도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왜란은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만큼 치열했다.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내고 결국 패하고 말았다. 최경회 역시 최후까지 싸우다가 남강에 투신했다. 조정에 의해 이조판서 겸 대제학에 추증되고 진주 충렬사에 모셔졌다. 1627년(인조 5)에는 좌찬성에 추서되고 1747년(영조 23)에는 충의(忠毅)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논개 역시 최경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진주성 전투에 가담, 의병들을 뒷바라지했다. 왜군이 승전 잔치를 벌이는 날 기생으로 위장하여 그녀가 그토록 사랑한 남편의 원수이자 나라의 원수인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으로 뛰어들어 이승을 마감하니 20세 꽃다운 나이였다.
최경회와 첫 인연을 맺었던 장수군청의 뜰에는 그녀가 심었다는 의암송이 4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의 굳은 충절처럼 청청함을 잃지 않고 서 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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