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악산 아래 첫 탄생한 감문국은 삼한시대 사로국(훗날 신라)의 대장군 석우로(昔于老)에 의해 231년에 멸망한다. 감문국의 주무대였던 개령'감문면 일대에는 사로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크고 작은 산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사로국은 감문국을 가야 공략의 전진기지이자 추풍령 유역을 거쳐 금강 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로 삼으려 했다. 사로국은 감문국을 정복하고 이곳에 감문군(231년)과 감문주(557년)를 설치해 지방행정과 군사거점으로 활용했다. 감문국 때 축조된 산성은 개보수를 통해 가야와 백제의 공략에 이용했다. 김천문화원 송기동 사무국장은 "삼한시대 감문국은 '친가야 반사로국' 정책을 추구하며 독자적인 정치세력화를 모색했다"며 "이는 감문국이 주조마국 등 인근 다른 소국에 비해 일찍 사로국의 정복 야욕에 희생되는 원인이 됐다"고 설명했다. 또 "사로국은 감문국을 멸망시키며 선산 무을과 상주 사벌 등 감천변의 비옥한 개령평야를 확보했고, 이는 사로국이 삼한시대 변한과 진한의 맹주로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원동력이 됐다"고 덧붙였다.
석우로는 감문국을 멸하고 철저하게 파괴했다, 이 때문에 지명'전설이나 산성 등 일부 유물 외에는 온전하게 전하고 있는 자료들을 찾을 수 없다. 특히 감문국 토벌의 중심에 서 있는 석우로는 흉폭한 인물로 전해진다. 야사에는 감문국을 토벌한 공으로 벼슬이 높아진 석우로가 왜국(倭國) 사신을 접대하는 연회장에서 술에 취해 "머지않아 너희 나라 임금을 잡아다가 소금 만드는 노예로 삼고 왕비는 밥 짓는 노비로 삼을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이 때문에 양국 관계가 냉랭해지고 왜국이 전쟁을 일으키자 신라왕이 석우로로 하여금 왜군의 진영에 찾아가 사죄할 것을 명한다. 하지만 왜군은 스스로 찾아온 석우로를 불에 태워 죽이고 물러갔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석우로의 군사가 감문국을 얼마나 철저히 파괴시켰는가를 미루어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흔적마저 희미해져 가는 감문산성
감문산성(甘文山城)은 감문국의 마지막 왕인 금효왕이 궁궐을 버리고 석우로의 군사와 싸우기 위해 항쟁 의지를 가지고 들어간 곳이다. 감문산성은 궁궐과 불과 2~4㎞ 정도 떨어져 있을 정도로 지척이다. 현재 개령면사무소가 있는 동부리 입구에서 개령향교, 계림사 방향으로 가다 계림사 주차장에서 차를 내려 산길로 접어든다. 산성의 흔적이 남아있는 곳이다. 계림사로 오르는 길녘에는 고추잠자리가 떼를 지어 길손을 반긴다. 다람쥐 한 마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도토리'밤 등 먹이를 구하려고 나왔다가 인기척에 저만큼 달아난다.
감문산 계림사는 아도화상과 인연이 깊은 절이다. 아도화상은 신라 눌지왕 1년(417년)에 선산 도리사를 짓고 이듬해 직지사를 짓기 위해 개령들을 드나들었다. 그는 풍수지리로 볼 때 이곳 지형이 호랑이가 드러누워 있는 와호형(臥虎形)으로 살기(殺氣)가 너무 강하다고 봤다. 아도화상은 살기를 억누르기 위해 호랑이의 심장에 해당하는 곳에 절을 짓고 호랑이와 상극인 닭을 수천 마리나 길렀다. 그러나 닭조차도 수시로 죽어나가 절의 이름을 계림사(鷄林寺)로 고쳤다고 한다.
등산길을 오르자 얼마 가지 않아 이정표가 감문산 정상을 가리킨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철조망이 쳐져 있다, 등산로 옆에 무덤이 있어 길을 돌려놓았다. 옛날에 감문산은 무덤이 없는 산이었다. 산 이름을 달리 성황산(城隍山)으로 부르는데 감문국의 내성으로서 나라를 지키는 최후의 보루(堡壘)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감문국 백성들은 이 산을 신성시했고 이곳에 무덤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 특히 동부리 마을 앞에는 '쌍샘'이라는 샘물이 있었다. 이 산에 묘를 쓰면 샘물에서 흙탕물이 솟아난다는 것. 마을 주민들은 모두가 이 샘물을 식수로 사용했는데 흙탕물이 나오면 마을이 발칵 뒤집어지고 주민들이 산을 이 잡듯이 샅샅이 뒤져 몰래 쓴 묘를 찾아 파내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묘를 파내 버려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쌍샘은 지금도 개령면사무소 입구에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은 감문산 곳곳에 무덤이 들어섰다. 이젠 마을 앞 샘물을 식수로 쓰지 않는데다 세월이 흘러 주민들도 감문산을 신성시하지 않고 평범한 야산 정도로 생각하는 탓이다.
30여 분 만에 해발 239m의 산 정상을 밟는다. 정상의 능선을 따라 인위적으로 축조된 흔적이 뚜렷한 토성(土城)이 있다. 흙을 쌓아 만든 탓인지 대부분 허물어지고 사라졌다. 지금은 높이 2.5m, 성의 폭이 10m 규모로 겨우 200m 정도만 옛 모습으로 남아 있다. 중앙부의 흙을 파내어 정상으로부터 바깥쪽으로 급경사가 되도록 쌓고 중심부를 평평하게 조성했다.
감문산 정상은 취적봉(吹笛峰) 또는 봉수산(烽燧山)으로도 불린다. 국가에 변란이 있을 때 산 정상에서 피리를 불거나 봉화불을 피웠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봉수대의 흔적은 지금도 뚜렷이 볼 수 있다.
산 정상에서 궁궐이 있는 마을 쪽을 내려다보니 이곳에 산성을 축조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감문산을 중심으로 좌우로 뻗어 내린 산줄기에 토성을 쌓고 지금 양천리 마을 뒤 저수지 쪽에 성을 쌓아 방어에 치중하면 쉽게 성이 함락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다. 감문토성 안쪽 마을 이름이 성안골(城內谷)로 이를 뒷받침한다. 산성은 감문국 왕궁의 배후에 해당하는 진산으로 유사시 피난처 및 지휘소의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까지 항쟁을 벌인 속문산성(俗門山城)
감문면에서 오지인 문무'송북리 사이에 속문산(俗門山)이 있다. 해발 600m 지점에 산정 능선을 따라 동북으로 석성(石城)과 토성(土城)이 혼용되어 축조됐다. 송북리에 있는 동북쪽은 자연절벽을 그대로 활용하고 있다. 성곽은 석축을 0.7m 정도 하단에 먼저 쌓고 그 위에 토성을 쌓는 방식이 주를 이루며 높이는 2.5m, 길이 800m에 달하는데 석성은 대부분 무너지고 일부만이 남아있다.
성내 북서쪽 끝부분에는 둘레 30m, 지름 10m, 높이 5m의 봉수대 터가 남아있다. 군창지(軍倉址)로 추정되는 정상부의 평평한 곳에선 많은 기와 조각이 발견되고 건물 기둥을 세웠던 구멍이 있는 대형 주춧돌이 남아있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속문산성에 대해 "석축의 둘레는 2천455척(尺)이고 높이는 7척인데 성내에 우물 2개와 못 2개, 군창이 있다"(石築周圍二千四百五十五尺 高七尺 內有二泉二池 有軍倉)고 기록돼 있다.
정상에 올라 보면 사료에 등장하는 우물과 저수지를 발견할 수 없다. 주민들은 "30여 년 전까지 우물과 물이 고인 큰 규모의 웅덩이가 있었다"고 말하지만 지금은 위치를 확인할 길이 없다.
속문산은 다른 이름으로 백운산(白雲山)이라고도 불린다. 감문국이 사로국의 석우로에 망하자 패잔병과 백성들은 속문산으로 들어와 끝까지 항전하다 사로국군에게 몰살을 당했다. 이때 죽은 감문국 백성들의 원혼이 구름으로 변해 산을 덮으니 이후 백운산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백운산 정상에서는 매년 주민들이 해맞이 행사를 열고 있다.
◆또 다른 산성인 고소산성(姑蘇山城)
감문면 문무리와 어모면 구례리와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365m의 고소산(姑蘇山), 일명 성산(城山)에도 산성의 흔적이 있다. 정상부로부터 50여m 아래에는 남북으로 길이 700m에 달하는 허물어진 석성이 남아 있다. 멀리 속문산성과 마주 보는 형국을 하고 있다. 석성의 대부분이 심하게 훼손된 상태이나 일부는 높이 5m에 달하는 거의 완벽한 형태의 성벽이 곳곳에 남아있으며 골짜기의 형태를 그대로 살려 정밀하게 축조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토성인 감문산성, 토성과 석성이 혼재된 속문산성과 달리 고소산성은 거의 대부분이 석재로 축성되었다. 자연석을 그대로 사용한 이전의 축조방식과 달리 가공한 석재를 이용해 한층 견고하면서도 세련된 축성술을 보여주고 있다. 감문국 산성이라고 알려진 것과는 달리 후대에 조성된 산성이라는 견해도 있다.
감문국 산성은 축조시기에 따라 순수토성인 감문산성이 시기적으로 가장 빠르고 다음으로 토성과 석성이 함께 사용된 속문산성, 돌을 사용해 규모와 그 정교함에서 돋보이는 고소산성이 가장 후대에 축조된 것으로 보인다.
글'박용우기자 ywpark@msnet.co.kr 사진'서하복작가 texcaf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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