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웃지 못할 일화 하나. 카이스트에 다니는 한 학생이 명절을 맞아 시외버스를 타고 고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버스 안에서 무료한 학생은 옆 좌석의 한 호기심 많은 할머니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게 됐다. 할머니는 별 뜻 없이 "총각은 어디 다니냐"고 물었고, 학생은 잠시 고민하다 과학기술원이라고 대답했다. '카이스트'라는 낯선 이름을 할머니가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할머니는 괜히 물었다는 듯 학생을 토닥이며 한마디 덧붙였다. "그래, 공부 못하면 기술이라도 배워야지. 힘내."
이런 교육계를 두고 사회 어느 분야보다 '보수적'이라고들 한다. 변화를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뜻일 테다. 그러나 요즘 현장에서 교사, 학생, 학부모들이 느끼는 교육계 변화는 따라잡지 못할 정도로 빠르다.
고교-대학 교육현장에서 '계열 파괴' 현상이 갈수록 두드러지고 있다. 전문대학에 지원하는 인문계 고교생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전문대학생 하면 당연히 전문계고(현 특성화고) 출신이라는 상식은 이젠 옛말이 돼버렸다.
지난달 중순 마감한 대구 7개 전문대학의 2013학년도 수시1차 모집 지원자 현황을 보면 이런 현상이 한눈에 드러난다. 전문대마다 인문계 고교 출신 학생이 주 지원대상인 일반전형의 지원자가 특성화 출신을 주로 뽑는 특별전형 지원자보다 훨씬 많다. 일부 대학은 80%를 넘는다. 정시에서도 일반전형이 더 많다. 현재 이들 전문대학 학생 중에는 인문계고 출신이 더 많다는 얘기다. 간호'보건 등 취업이 잘되는 학과는 아예 인문계고 학생이 대세다. 4년제 대학졸업자와 같은 '국시'를 쳐야 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공부습관이 잡힌 인문계고 학생들이 유리하다며 대학관계자들도 반기는 분위기다.
물론 우리나라 전문대학들이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적어도 전문대 강세가 뚜렷한 대구에서는 대체로 통용된다. 이쯤 되고 보면 "우리 대학에 떨어진 애가 4년제 대학에는 붙었더라"는 한 전문대 관계자의 자랑(?)에 고개가 끄덕여지기도 한다.
이런 변화는 불과 2, 3년 전부터 가속화됐다. 가깝게는 특성화고의 '선(先) 취업 후(後) 진학' 정책 영향이고, 멀게는 이제 '간판'이 아니라 '취업'이 대학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됐다는 얘기다. 대학을 졸업하고 다시 전문대 인기학과에 재입학하는 '학력 U턴 현상'도 비슷한 맥락이라 하겠다.
하지만 이런 현상과 관련해 보완할 점도 많다. 먼저 전문대에 지원하는 인문계고 학생들은 갈수록 느는데 인문계 고교들이 전문대 진학지도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과 준비가 되어 있느냐 하는 점이다. 간호보건 등 진로나 합격 예측이 비교적 분명한 학과를 제외한 전공에 대해서는 진학가이드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상당수 고교에서는 전문대 입학담당자들을 초청해 입시정보를 제공한다는데 일회성에 그치지나 않는지 걱정스럽다.
전문대학들도 나날이 늘어가는 인문계고 입학생들을 위한 교육 커리큘럼의 변화가 필요하다. 가령 연장이라고는 만져본 적도 없는 인문계 고교생이 전문대 기계계열 등에 입학했을 때 전문대학은 예전 특성화고 학생을 가르칠 때와는 다른 교육과정을 개발해야 한다. 그래야 계열을 뛰어넘어 어렵게 전문대에 입학한 인문계고 학생들이 뒤늦게 합격증을 반납하고 조기자퇴하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이다.
댓글 많은 뉴스
국힘 김상욱 "尹 탄핵 기각되면 죽을 때까지 단식"
[단독] 경주에 근무했던 일부 기관장들 경주신라CC에서 부킹·그린피 '특혜 라운딩'
민주 "이재명 암살 계획 제보…신변보호 요청 검토"
국회 목욕탕 TV 논쟁…권성동 "맨날 MBC만" vs 이광희 "내가 틀었다"
최재해 감사원장 탄핵소추 전원일치 기각…즉시 업무 복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