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좋은생각 행복편지] 가을의 소리

가을입니다. 투명한 공기를 가르고 소리들이 달려옵니다. 솔라 솔라 솔라 솔라…, 미파파파파솔 미파파파파솔 미파파파파솔…. 들려오는 소리를 굳이 음으로 옮기자면 그렇습니다. 풀밭을 가로질러 이동하는 길, 공원주변을 거닐다보면 조금씩 장소를 옮길 때마다 소리가 들립니다. 어느 소리도 같은 소리가 아닙니다. 가히 풀벌레들의 아카펠라 연주입니다. 대부분은 귀뚜라미 과에 속하는 귀뚜라미, 방울벌레 종류일 것 같습니다. 혼자뿐이라고 생각한 공간에 돌연 혼자가 아닙니다.

'넌 누구니? 네 모습을 보여줘.'

풀숲에 꼭꼭 숨어있는 그들은 여간해선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가까이 다가서면 소리를 죽이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오히려 나을 듯합니다.

소리를 정확히 나타내기 위해서는 음향신호를 녹음하고 진동하는 파형을 분석해야 하겠지만 풀벌레가 내는 소리를 음으로 바꾸거나 음절과 구로 나누어 소리를 기억해보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렇게 기억한 소리는 풀벌레 소리자료를 통하여 그 주인공을 찾아낼 수 있겠지요.

제 귀에 '솔라 솔라 솔라 솔라'로 들리는 풀벌레는 알락방울벌레인 듯합니다. '미파파파파솔 미파파파파솔 미파파파파솔'로 들리는 풀벌레는 모대가리귀뚜라미인 듯합니다. '뀌뀌뀌뀌 뀌뀌뀌뀌 뀌뀌뀌뀌'로 들리는 벌레는 극동귀뚜라미인 듯합니다.

풀벌레들이 우는 가장 큰 이유는 수컷이 짝짓기를 할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바이올린을 연주하듯 수컷이 오른쪽 앞날개의 줄과 왼쪽 앞날개의 마찰판을 비벼서 저마다의 음을 만들어내면 그것을 들은 암컷이 제 귀에 가장 매력적인 소리를 찾아가겠지요. 덕분에 그들이 원하는 대상이 아닌 우리도 가을에는 귀가 즐거워집니다.

'노래지빠귀'라는 새가 있습니다. 오래 전 뉴질랜드에 잠시 머물 때 이른 아침 높은 나무 위에서 허공을 향해 목청을 구르던 새였습니다. 소리가 어찌나 아름답던지 그 주인공이 몹시 궁금해졌습니다. 소리 나는 방향을 추적하길 며칠, 육안으로 발견한 새의 모습은 흰색 가슴에 갈색점이 많이 박혀있는 점박이 새였습니다.

노래지빠귀에게 생긴 관심은 '블랙버드'라는 새가 집 근처의 나무에서 알을 품는 장면을 놓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 둥지 밖으로 비죽 올라온 꼬리, 주황색부리와 반짝이는 눈망울을 발견한 이후 새의 안부를 자주 확인했습니다. 간혹 새가 보이지 않을 때면 가슴이 철렁하다가도 먹이를 채 넘기지도 못한 채 입을 우물거리며 푸다닥 둥지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안심이 되었습니다. 노래지빠귀도 다시 눈에 포착되었습니다. 둥지를 만들기 위해 지푸라기를 물어와 거미줄을 묻히고 있었습니다. 새가 접착제로 거미줄을 사용하다니요.

알을 품고 지키는 일이 주 임무가 된 새들의 소리는 아름다운 세레나데에서 시끄러운 경고음과 신호음으로 바뀌어갔습니다. 어느 날 둥지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고양이를 발견한 이후론 앞장서 놈을 쫓아주었습니다. 거센 바람을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는 밤에는 둥지 걱정으로 잠을 설쳤습니다. 새에 대한 애정이 깊어가고 있었습니다.

'알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다'고 하지 않던가요.

환경의 파괴로 사라져가는 생물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이대로 지속된다면 우리의 숲에서 파란 테의 멋진 안경을 쓰고 있는 '긴꼬리딱새'나 아름다운 색깔의 '팔색조'를 볼 수 없는 날이 오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만저만 아쉬운 일이 아니겠지요. 풍부한 생물종은 환경의 지표가 될 뿐 아니라 천재지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유전자 풀을 보유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라져가는 생물종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도움은 자연에 살고 있는 생물들에 대한 관심인 듯합니다. 관심이 생기면 탐구하고 발견하는 기쁨은 덤으로 누리겠지요.

풀벌레 소리 은은한 가을입니다.

백옥경/구미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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