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은 유난히 덥고 길었다. 늦깎이 태풍 볼라벤과 산바가 산하를 흔들었다. 결실을 앞둔 과실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제 천고마비의 계절 가을, 자연이 준 심술을 이겨내고 맞이한 가을이기에 더없이 반갑다. 누렇게 물든 들판과 붉게 물든 단풍이 이처럼 아름답게 보이는 것은 풍성한 수확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시인 김현승은 가을을 기도와 사랑, 고독으로 노래했다. 릴케의 노래 가을날은 아름답지만 왠지 쓸쓸하다.
군중 속에 파묻힌 개인은 고독하고, 발전하는 국가경제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골목 상인은 서럽고 고달프다. 다가오는 대선 때문에 서로 견해를 달리하는 이웃끼리 눈을 흘기기도 지겹고, 엄연한 한국 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면서 일본군 성노예, 종군위안부의 실체를 부인하는 이웃나라의 억지 주장도 역겹다.
1970년 겨울, 당시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는 홀로코스트의 현장인 폴란드 바르샤바 전몰 희생자 추모비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고 사과했는데, 후회와 반성은 있지만 적절한 배상과 사과는 없다는 주장을 되풀이하는 노다(野田) 일본 총리의 심보를 이해할 수 없다.
모진 태풍을 견뎌낸 오곡백과는 분명히 강렬한 태양 에너지를 몸속에 간직했기에 낙과하지 않았으리라. 봄날의 파종에서 시작하여 살인적인 더위와 한발, 홍수 등 인고의 세월을 보내면서 뜨거운 태양의 열기를 품었기에 달콤한 과일을 잉태했고, 기름진 곡식을 출산시킨 것이다.
그러기에 가을에 수확되는 열매에서 기다림과 참음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 꽃이 다시 피고 지진으로 무너진 땅에서 맑은 샘이 솟아나듯이, 시련과 고통의 시간이 지나면 축복의 세월은 다시 오는 것이 대자연의 섭리가 아닐까.
세계적인 경제 불황, 영토 분쟁으로 인한 이웃나라 간의 갈등, 중동에서 감지되는 종교적인 견해 차이로 인한 전운 등 잠시라도 마음 편할 날 없는 지구촌이다. 마치 장자(莊子)가 소요유(逍遙遊)에서 설파한 것처럼 하생추사(夏生秋死)하기에 봄과 가을을 모르는 쓰르라미에 불과한 인류가 끊임없이 다투면서 살아가는 것 같다.
하지만 길고긴 여름을 지나면서 찾아온 공활한 가을 하늘은 맑고 아름답다. 지친 심신을 달래줄 달고 맛있는 과일과 곡식이 우리를 기다린다. 이 모든 것이 고난의 봄과 여름을 견뎠기 때문이다.
가을이 지나면 여름에 못지않은 북풍 한파가 찾아온다. 그러나 가을의 결실에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이어감으로써 모진 겨울을 이겨낼 용기가 싹튼다. 조그만 날짐승이 대붕(大鵬)의 비상을 어찌 알랴마는 소시민은 소시민으로서의 성찰(省察)을 통해서 살아가는 방법이 있음을 이 가을에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정재용/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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