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데스크칼럼] 웃으며 죽어간다

'진상 손님'(블랙컨슈머) 김대성이 등장한다. 김대성은 이미 반을 마신 소주에 이상이 있다며 "이걸 마시면 취한다. 취해도 너무 취한다"고 다짜고짜 교환을 요구한다. 하지만 매장 직원 송병철은 교환을 거부한다. 김대성의 엄마(정 여사) 역인 정태호가 '브라우니'(인형 개)를 끌고 나타난다.

정태호는 송병철에게 "무슨 문제가 있느냐"고 묻는다. 송병철이 소주를 내보인다. 그러자 정태호는 "이거 마시고 얘가 나한테 반말했다. 트라우마가 있다"며 막무가내로 "바꿔 달라"고 한다. 또 "이유가 있으니까 바꿔 달라"고 덧붙인다. 그 이유를 묻는 송병철에게 "써. 이건 써도 너무~ 써"라고 한다.

송병철이 "규정상 안 된다"고 하자, 정태호는 "미스 송, 너 오늘 짤렸다"고 으름장을 놓으며 브라우니를 향해 송병철을 물라고 지시한다. 또 "내가 신고 안 할 테니까 좋은 말할 때 바꿔달라"고 우긴다. 결국 송병철은 "내 월급으로 바꿔주겠다"며 고급 와인을 내놓는다. 정태호와 김대성은 '원 플러스 원'이라며 한 병을 더 챙겨 달아난다. 송병철은 "있는 사람이 더하다"며 혀를 내두른다.

이상은 블랙컨슈머(black consumer'고의로 악성 민원을 제기하는 소비자)의 실상을 풍자한 KBS2 '개그콘서트'의 '정 여사'의 한 장면. 이 코너에서 매장 직원 송병철은 무시할 수 없는 고객인 모녀(?)의 '극상 진상'으로 인해 매번 골탕을 먹는다. 황당하고 분하지만 화를 낼 수도 없다. 속은 숯검댕이 된다. 그는 자신의 감정을 숨겨야 하는 '감정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감정 노동자란 용어는 앨리 러셀 혹실드 캘리포니아주립대 사회학과 교수가 1983년 '감정 노동'(The Managed Heart)이라는 저서를 통해 언급한 개념에서 비롯됐다. 혹실드 교수는 인간의 감정까지 상품화하는 현대사회의 단면을 '감정 노동'(emotional labor)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즉, 실제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는 무관하게 직무를 해야 하는 감정적 노동을 감정 노동이라 하며, 이런 직종 종사자를 감정 노동 종사자라고 한다. 은행 창구 직원'승무원'전화 상담원'백화점 점원처럼 직접 고객을 응대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서비스해야 하는 사람들이 감정 노동자에 포함된다.

최근 감정 노동자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다. 핵심은 유통업계 판매 사원들의 최저임금 문제를 비롯해 이른바 '웃으며 죽어간다'(감정 노동자들이 웃으면서 고객을 상대하지만 그 스트레스로 마음이 병들어 간다는 의미)는 서비스업 종사자들에 대한 처우 개선 문제와 감정 노동자의 범위에 대한 논란이다. 민주노총은 정부가 감정 노동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감정 노동자의 정신적 질병에 대한 산재보험 적용과 보호 제도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심각성을 인식해 '여성 감정 노동자 인권 수첩'을 만들어 백화점, 대형마트, 콜센터 등에서 일하는 여성 감정 노동자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서비스산업이 확대되고 고객 만족 경영이 강조되면서 감정 노동자가 늘고 있다. 통계청 경제활동인구조사(2011년)에 따르면 국내 서비스직 종사자는 540만 명에 이른다. 감정 노동자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무엇일까? 자신의 감정을 가능한 한 숨기고 고객이 원하는 감정만을 드러내야 한다는 점일 것이다. 고객이 얼토당토않은 요구를 하거나 심지어 욕설이나 성희롱적인 표현을 해도 감정을 삭여야 한다. 행여 감정에 북받쳐 고객과 말싸움이라도 생기면 밥줄이 떨어져 나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당수 업체는 서비스 개선과 평가를 이유로 미스터리 쇼퍼(mystery shopper'고객으로 가장해 매장 점원의 친절도 등을 평가하는 사람)를 고용해 수시로 직원들을 '감시'하고 있다.

지난해 전국민간서비스산업노동조합연맹이 서비스 업종 종사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4분의 1 이상이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감정의 표현이 극도로 억압되면 감정의 괴리가 커지고 이는 스트레스 질환이나 우울증을 유발한다.

법적'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 여기에는 감정 노동자에 대한 인권 강화 및 경제적 처우 개선, 지속적 상담과 치료 시스템 마련 등이 포함돼야 할 것이다. 또한 감정 노동자에게 과도한 친절을 바라는 소비자의 의식도 변해야 한다. 우리는 소비자이면서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최신 기사

많이 본 뉴스

일간
주간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