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강석연은 1914년 제주도에서 출생했지만, 일찍부터 부모를 따라 서울로 올라와 자랐습니다. 언니 강석제는 토월회에서 활동하는 배우였고, 이 언니의 영향을 받아서 무대 활동을 펼쳤습니다. 예능 방면으로 천부적 재능이 있어서 연극, 라디오 드라마 출연, 노래 등으로 이름이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지요.
당시 서울에 진출해 있던 일본 콜럼비아레코드사 서울지점에서 노래 잘 부르는 강석연을 뽑아서 전속으로 편입했습니다. 그만큼 당시로서는 가수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렵던 시절이었지요. 기생, 영화배우, 연극배우 등이 가장 만만한 가수 발탁의 대상이었습니다.
소설가, 극작가이자 유명 작사가였던 박노홍 선생의 증언에 의하면 강석연의 외모는 '다소 통통하게 생겼으며 모든 행동에 야무진 구석이 많았고, 노래 부르는 모습과 창법도 야무졌다'고 합니다. 드디어 1931년 2월 강석연은 '방랑가'와 '오동나무' 등 2곡을 콜럼비아레코드사에서 발표하였는데, 이 작품은 강석연의 위상을 가수로 심어주는 일에 크나큰 기여를 했지요. 흔히들 '방랑가'를 평가하면서 이 노래가 식민지 시대에 많이도 발표되었던 유성기 음반 중 이른바 '방랑물'(放浪物) 가요의 기점 역할을 하였다고 합니다. 대중들의 반응이 워낙 드높아서 여러 레코드회사에서는 여타 인기곡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이 노래를 이애리수를 비롯한 다른 가수의 버전으로 취입하여 발매하기도 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도 유독 강석연이 부른 노래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는 우뚝한 창법으로 시대적 분위기와 색깔을 잘 담아서 들려줍니다. 강석연의 '방랑가'를 다시금 귀 기울여 들어보면 넋을 놓고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아득한 눈보라 벌판을 걸어가는 한 사내의 모습이 보입니다. 하지만 이 노래는 가파른 세월 앞에서 속수무책으로 살아가는 한 지식인의 반성을 처연하게 이끌어 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렇게 무대책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강렬한 경고와 메시지를 작품의 바탕에 단호하게 깔고 있는 것이지요.
옛 노래는 결코 표면에 나타난 그대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그 주변에 서려 있는 울림과 반향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제대로 된 맛을 읽어낼 수가 있습니다.
이 노래와 같은 음반의 앞뒷면에 수록된 신민요 '오동나무'는 또 어떠합니까? 당시에도 검열의 매서운 눈초리는 삼엄했을 터이지만 이 노래의 효과는 전반적으로 눈물, 이별, 설움, 원한 따위에 대하여 그 원인을 따져서 묻고 비통한 현실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5절 가사에서 '금수강산은 다 어데 가고요/ 황막한 황야가 웬일인가'란 대목을 읽으며 우리의 억장은 무너지는 듯합니다. 그 아름답고 평화롭던 금수강산의 현실이 이제는 황막한 황야로 변모해버린 정황에 대하여 개탄을 표시합니다. 이것은 단순한 노래 가사가 아니라 거의 민족의 가슴을 세차게 후려치는 웅변적 효과와 위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뜻이 담긴 대목을 가수 강석연은 처연하게도 불러냅니다. 후렴구에서의 여운은 이런 비통한 심정을 한층 고조시킵니다.
유성기 음반 자료는 식민지 시대 주민들의 내면풍경을 고스란히 알게 해주는 매우 소중한 우리의 문화유산입니다. 많은 음반 자료들이 여전히 먼지를 덮어쓴 채 우리 앞에 그 전체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영남대 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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