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문인협회 산길모임의 김찬일 회장이 협회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 모임을 결성하고 첫 대상지로 경남 사천의 봉명산 다솔사(多率寺)를 가기로 했으니 희망자는 신청하라는 것이었다. 남들처럼 신춘문예를 통해 화려하게 등단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글을 직업적으로 쓰는 전업 작가도 아닌 나로서는 회원이기는 하지만 모임에 자주 참석하지 않는데 이번은 달랐다. 경관이 수려하다는 말에는 그리 호감이 가지 않았지만 만해 한용운(1879~1944) 스님이 회갑(回甲)을 맞아 심은 황금편백(黃金扁柏)나무가 있다는 것에 마음이 더 끌려 참가했다.
스님과의 인연은 엉뚱하게도 어느 소녀로부터 비롯되었다. 고교시절 그때에는 누구나 그랬듯이 문학소년이었고 교내외에 글을 발표하면서 또래들과 어울렸다. 그녀의 집은 시내에 있었고 나는 인근 군에서 소위 유학을 했기 때문에 졸업 후에는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그랬던지 첫 장에 '님의 침묵'을 써 붙인 노트 한 권을 선물했다. 당시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시(詩)려니 생각했다. 지금 돌아보면 연정(?)의 표시인 것 같기도 하나 지금도 알 수 없는 일이다. 이런 연유로 한용운은 내 가슴 속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시인이었다. 더구나 산림공무원으로 청춘을 보내고 은퇴한 지금, 옛 사람이 심은 나무를 찾아 전국을 다니는 나로서는 스님이 심은 나무가 있다는 사실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님은 1879년(고종 16년) 충남 홍성 출신으로 농민운동과 의병활동이 치열하던 시기에 청소년기를 보냈다. 27세 때 고향을 떠나 강원도 백담사 등을 전전하며 불교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05년(고종 42년) 전영제 스승으로부터 계(戒)를 받고 승려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각지를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이러한 경험이 그의 사상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1910년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겼다. 이듬해 송광사로 간 스님은 박한영, 진진웅, 김종래 등과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여 일본의 조동종(曹洞宗)과 한국불교를 통합하려는 이회동 등의 친일행위를 규탄하고 이어 1914년 조선불교회장에 취임했다.
1919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나 곧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출옥 후 오히려 그의 독립운동은 더 활발해져 인재 양성에 필요한 대학 설립운동, 물산장려운동을 위해 뛰었다.
1924년 조선불교청년회 총재, 1927년 신간회 중앙 집행위원과 경성(서울)지회장, 1930년에는 김법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법려비밀결사인 만당(卍當)의 당수(黨首)로 추대되고, 1931년 잡지 '불교'를 인수하여 사장(社長)이 되었다. 또한 1940년 창씨개명반대운동에 참여하고, 1943년 조선인학병출정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이후에도 일제의 강압통치를 반대하고 총독부가 마주 보이는 것조차 싫다며 문이 북쪽으로 난 성북동 집에 살다가 광복을 1년여 앞두고 66세 나이로 돌아가셨다. 스님은 조선불교유신론을 통해 불교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했고, '님의 침묵'을 비롯한 시, 시조, 소설 등 문학가로서도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다솔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신라불교를 반석에 올려놓은 자장율사와 화엄종조인 의상대사, 풍수지리설의 비조 도선국사, 고려 말의 이름 난 스님 나옹화상이 불법을 펼친 곳이자 만해 스님이 이곳에서 독립선언문을 기초했으며, 소설가 김동리가 그의 대표작 등신불(等身佛)을 집필하고, 한국전통다도의 새 장을 열었다는 최범술 선생이 '한국의 다도'를 펴낸 곳이다.
절은 생각했던 것보다 크지 않았다. 여느 사람들과 같이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친견하는 것으로 참배를 시작했지만 마음은 황금편백나무에 가 있었다.
주위를 살피기 시작했다. 제헌국회의원을 지낸 최범술, 문교부장관을 지낸 김법린, 동양 철학자이자 김동리 선생의 형인 김범부 등 당대의 명사들이 스님의 회갑(1939년 8월 29일)을 맞아 기념으로 심었다면 절의 한가운데나 대중들이 잘 보이는 곳에 심었을 것이라는 내 짐작은 빗나갔다.
대웅전 앞마당 오른쪽 옆으로 난 작은 길을 통해 나가니 대양루(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 동쪽 비탈진 곳에 황금편백나무가 하늘을 찌를 듯 서 있었다. 그러나 어디에도 만해 스님이 회갑 때 심었다는 안내판은 없었다. 편백나무 중에서 잎의 가장자리에 황금빛이 도는 것이 황금편백나무다. 기후에 잘 맞아 그런지 마음껏 자란 것 같다. 찬찬히 살펴보니 그곳 말고도 봉명산을 오르는 등산로 쪽 밭둑에도 몇 그루 더 있었다.
대구생명의 숲 운영위원(ljw167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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